[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1부 헬베티카, 서체를 넘어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하다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1부 헬베티카, 서체를 넘어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하다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1부 헬베티카, 서체를 넘어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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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부터 3회에 걸쳐 영국감독 게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에 대한 리뷰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다큐멘터리는 서체 본연의 정체성을 다룬 영화 ‘헬 베티카(Helvetica, 2007)’를 시작으로 제품디자인을 주제로 다룬 ‘오브젝티파이드(Objectified, 2009)’, 도시디자인을 다룬 ‘어버나이즈드(Urbanized, 2011)’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를 풀어갈 헬베티카에 이어, 다음 포스팅에서는 제품디자인을 통해서 사용자와 제품 사이의 관계, 사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며, 마지막으로 전세계의 도시를 디자인한 사람들과 공간을 주제로 앞으로 디자인이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지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문자는 크게 두 가지 입력체계를 지닙니다.
‘손으로 썼느냐?’ 혹은 ‘프린터로 뽑았느냐?’

그에 반해 다큐멘터리 <헬베티카>의 오프닝 시퀀스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고전적인 인쇄소를 배경으로 활자와 활판이 부딪히고, 잉크가 칠해져 종이에 묻어나는 과정을 덤덤하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서체들이 실은 ‘활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헬베티카’라는 서체가 지닌 역사성을 넌지시 암시합니다.

스위스 태생의 헬베티카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디자이너 사이에서 우스개 소리로 “마땅히 쓸만한 서체가 없다면 헬베티카를 써라”는 말이 오고 갈 정도로 헬베티카는 일종의 ‘표준’으로써 기능하는 서체입니다.

오늘날 헬베티카가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 배경에는 모던디자인의 영향이 있었는데,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 양식을 대변하는 세리프 서체에서 벗어나 군더더기 없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전달하자는 목적으로 많은 디자이너가 헬베티카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빔 크라우엘은 헬베티카와 함께 수많은 작업을 해냈습니다.
그는 서체가 과도한 개성을 지닐 경우 정작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가 가려질 수 있다고 말하며, 헬베티카야말로 좋은 서체가 지녀야 할 덕목인 ‘투명함(의역)’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를 비롯한 많은 수의 디자이너가 헬베티카를 사랑하는 이유는 소위 말해 ‘빈 유리잔’에 가장 가까운 서체이기 때문입니다. 안에 어떤 음료를 담아도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특성을 지녔기에 헬베티카는 기업의 아이덴티티를 비롯해 공공기관, 세계적인 의류 프랜차이즈까지 다양한 영역을 소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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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elvetica(2007), 대니 반 덴 뒹엔(Danny van den Dungen, 네덜란드 Experimental Jetset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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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elvetica(2007), 데이비드 카슨 (미국)

<헬베티카>는 다큐멘터리 초반부를 헬베티카를 찬탄하는 디자이너의 목소리를 들려주다가, 헬베티카를 거부한 디자이너들을 보여주며 의도적인 혼선을 빚어냅니다.

데이비드 카슨, 스테판 세그마이스터와 같은 스타 디자이너들은 헬베티카를 두고, 모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아무런 표정도 없는 ‘무표정한 서체’인 것이라며 비판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며 때때로 디자이너가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를 좁히고 안전하게 처리하기 위해 헬베티카가 쓰이는 경우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말해 타이포그래퍼들을 위한 도깨비 방망이인 셈이죠.

아무런 리스크 없이 무난하다는 사실이 디자이너들이 보다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다양한 실험과 도전할 기회를 앗아가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자처하는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현상을 두고 두고 ‘게으르다’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으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하지 않고, 헬베티카를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세태를 비판했습니다.

헬베티카라는 서체를 바라보는 디자이너들의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경력과 작업을 통해 구축된 디자인 철학에 기반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칫 헬베티카에 대한 찬탄이 가득한 러브레터가 될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가 한쪽의 편에도 서지 않은 채 멈춰선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감독인 게리 허스트윗은 “그래픽 디자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는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헬베티카>를 제작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아마도 서체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공간에 있는 디자이너들을 시공간의 제약 없이, 한 테이블에 앉혀놓고 서로의 철학이 충돌하는 지점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순전히 ‘어느 쪽이 옳은가’의 수준을 넘어 ‘나에게 헬베티카는 무엇일까’, 나아가 ‘좋은 서체란 무엇일까’하는 질문의 확장을 일으킵니다.

건설적인 토론은 신념에 기반한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관점은 생각과 경험의 상호작용이며, 생각은 때때로 좋은 질문을 통해 시작된다는 점에서 <헬베티카>는 비단 서체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래픽 디자인의 진보를 위한 건설적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원래 이래’와 같은 말로 관성적 법칙에 의식을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당연한 것은 없다’고 외치며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다음 편에서 디자인의 구현 및 제품의 지속가능성을 다룬 를 다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고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