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감소의 시대를 맞은 현대미술’ 세미나 후기

지난 수요일, 팀장님께 이야기를 드리고 오래전 부터 가고 싶었던 현대미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세미나 장소 거리 때문에 팀장님께서 20분 정도 일찍 퇴근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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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장소는 국민대학교 예술관이었습니다.
가보니 자리는 빽빽하게 다 들어찼고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과 같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학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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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는 개인적으로 관련이 많은 학교입니다.
구 여친이 이 학교에 다니기도 했었고,
독립영화 제작당시 미술감독을 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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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미나 강의 선생님은 스타 비평가 ‘임근준’선생님입니다.
이분은 우리나라에서 LGBT(레즈,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운동을 제일 처음
하셨습니다.
엄청나게 높은 임근준 선생의 팬덤 때문에 자리가 꽉꽉 들어 찼고
자리가 모자라 들어올 수 없었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문이 터질려고 하는 장면이 연출)

기대감소의 시대를 맞은 현대미술 : 당대성의 붕괴와 참조적 현대성,
그리고 지표가 되는 작가 열아홉

위의 빨간색 텍스트는 세미나 제목입니다. 엄청나게 거창하죠?
저도 제목만 보고 약간 주춤 했습니다.
중간마다 졸 뻔 했지만 20분을 일찍 퇴근 시켜주신 김팀장님의 부처 얼굴이
임근준 선생님 얼굴과 자연스레 오버레이 또는 멀티플라이 되면서 잠을 쫓을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의 주요 주제는 컨템포러리(당대성)의 상실 후에 찾아오는 새로운 미술의 방법론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임근준 선생이 즐겨 쓰는 미술사의 연대기 구별 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부분은 제가 첫 포스팅때 실수로 1975년의 자리에 소비에트 해체를 넣은 것을 선생님께서
지적해 주셔서 수정을 했습니다. 1975년 입니다 여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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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용이하게 위의 표를 간략히 만들어 보았습니다.
다른 것들은 아실 테고 임근준 선생이 제시하는 미술사에는 약간 특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1~2차 세계대전, 즉 양차 대전에서부터 1975년 까지를 ‘PostWar Modernism’
이라고 명명하고 그 다음 부터 금융사태 까지를 ‘Contemporary’라고 규정합니다.
보통은 그냥 저 두 시기를 포스트 모던(컨템포러리)이라고 합니다만
임근준 선생님의 구별법이 저는 훨씬 디테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사나 디자인사의 구분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멘털리티가
변화되는 주요한 모멘텀들이 대부분인데 양차대전시대 부터 금융사태까지를
몽땅 포스트모던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조금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여러 역사학자와 미학자들, 비평가들은 금융사태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명확한 이름을
지어놓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영국의 비평가 니콜라 부리오가 현시대를 altermodernism(변형된 모던)의 시대,
혹은 atemporality(무시간성)라고 말한 것들을 빌려 쓰고 있는 상황이며 명확한 이름이
없는 시대입니다.(그러니 작금을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하면 안된다는 말씀!)
그로므로 오늘의 세미나 주제는 이 형용하기 힘든(이름도 없는)
작금의 시대를 나름(?)잘 헤쳐나가고 있는 예술가들 19명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이 강의의 주요 내용은 이 19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19명에 대해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주제 넘게
포스팅 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에 주요 내용을 빼버렸습니다.
혹시나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저에게 오시면 세미나에서 받은 유인물을
복사해 드리겠습니다.
후에 제가 이 19명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수준이 온다면 그때 다시 포스팅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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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강의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바로 얼터모던(가칭)의 시대를 맞이해
‘좀비화 된 역사의 망령들과 싸워야 한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인 즉슨 지나간 과거의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디지털 기술로 복원되 검색
한 번이면 실제와 같이 뚜렷이 우리 옆에 도사리며
그에 발맞춰 죽은 사람의 회고전(앤디 워홀)이 매년 열리는 이 웃지 못할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젊은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까 내 옆의 적은 같은 반 친구나 동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죽은 ‘앤디 워홀’이라는 말입니다.
즉 ‘atemporality’에서의 무시간성이라는 것은
디지털 기술로 부터 과거를 좀비처럼 되살리기가 너무나 쉬워졌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가진 공통의 멘털리티가 과거를
지나간 과거로 보지 않는(현재축으로 보는)
평면적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인터넷의 폐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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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저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근준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2008년 금융사태 이후로 미래(자본주의)에 대한
기대가 없어졌으며 앞으로 남은 미래에 대한 모습들은 모두 Blue Print(청사진)
즉, 우리가 그려야 할 미래는 다 그려져 있고 여러 종류의 구상도로만 남았다고 합니다.
제가 회사를 다니며 적금을 넣고 미래를 설계하며 운동을 하는 것들은 사실,
현실을 담보 삼은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은 고리타분한 이야기 일 수 있겠지만 어차피 청사진으로 남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들을
가지고 살 바엔 현실에 충실하며 아름다웠던 과거를 식민지화 해서 즐겁게(생각없이)
살아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철은 언제..)
그럼 다음을 기약하며.

 

by 김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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