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를 위한 서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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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졸업 전시 주제로 브랜딩을 선택했었습니다. 준비하던 과정이 끝나고 브랜드의 서체를 정하는 단계가 오자 저는 항상 그랬듯 디자인이 더 예뻐 보일 수 있는 서체, 마음에 드는 서체, 그리고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는 것을 위주로 서체 선택을 했고 당당히 퓨추라 서체를 골라 교수님께 사전 컨펌을 받았습니다.

교수님께선 왜 이 서체를 사용하였는지에 관해 물으셨지만, 당시 전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하여 ‘그냥 예쁘고 디자인적으로 보일 것 같아서요’ 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처음 알게 됐습니다. 모든 디자이너들은 서체를 선정할 때 ‘그냥 예뻐서’ 라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이 시를 쓸 때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시어를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듯이, 디자이너 역시 정보의 성격과 콘셉트에 따라 이를 더 시각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서체를 선택해야 할 것이고, 이때 서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경험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때 서체에 대한 기본 지식이라는 것은 ‘서체 고유의 특징적 형태와 역사’ 입니다.

서체는 그 자체로써 특정 목적으로 만들어진 디자이너의 시각적 창작물이자 한 시대와 문화의 산물입니다. 세리프인가 산세리프인가, 펜글씨를 본뜬 서체인가,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가 모더니즘 시대의 산물인가 등의 하나의 서체를 둘러싼 다양한 정보와 형태에 대한 이해는 모두 디자이너의 시각적 선택의 근거이자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때 서체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이해는 강점이 될 것이며 시각적인 작업물을 진행할 때 지금까지와 다른 이유로 서체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소개하고 싶은 서체들이 너무 많았지만, 가장 많이 접하고 사용하는 서체 6가지를 선정하여 소개하려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서체에 대해 관심이 생겨 알아가는 지식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그 서체를 선택하고 사용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가라몬드(Garamond)  

우아하고 품격있는 세리프 서체의 원형

로마 글꼴의 서체 중 올드 스타일의 대표적인 서체인 가라몬드는 16세기 프랑스에서 개발된 서체이자 수많은 갈래의 세리프 로만 서체가 파생된 원천입니다. 서체 조각가 클로드 가라몽(Claude Garamond)이 만들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서체에 비해 인쇄라는 기술과 그 용도에 더욱 적합하도록, 시각적 질서가 고르고 가독성이 높은 방향으로 개발되었습니다.

15050810112225246_TS출처: Typography Seoul

손글씨의 영향은 여전히 보이지만 소문자의 높이가 커지고 획의 방향이나 세리프 등 획의 마무리 모양에서 시각적인 통일성이 보여집니다. 가라몬드는 유럽 각국이 자국의 기질을 반영하는 서체 디자인을 가지기 전까지 한 세기 이상 유럽의 표준서체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에도 아름답고 편안한 본문용 서체로서, 메시지에 품격이 있고 부드러운 어조를 부여하는 제목용 서체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퍼 얀 치홀트(Jan Tschichold, 1902~1974)가 독일의 서체 제작사들로부터 새로운 시대와 기술에 적합한 본문용 서체 디자인을 의뢰 받았을 때, 그가 주저하지 않고 선택한 서체 역시 가라몬드 였다고 합니다. 그는 후에 가라몬드에 바탕을 둔 보다 가독성 있는 서체 ‘사봉(Sabon)’을 디자인 하였습니다. 또한 한 때 애플 컴퓨터사는 가라몬드를 전용 서체로 선택하여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그 친근한 모습이 유용함을 증명하였고, 현대적인 감각에 맞춰 날씬하게 변형시킨 ITC사의 애플 가라몬드(Apple Garamond)는 제품, 제품 패키지, 광고 캠페인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젊은이를 위한 편안한 친구 같은 애플’ 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시켜주었습니다.

15050810112234129_TSAdobe Garamond™ Pro Regular, 출처: Typography Seoul

15050810112244604_TSStempel garamond™ Std Roman,  출처: Typography Seoul

오늘날의 많은 디지털 가라몬드는 디자이너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는데 전문가들에 의하면 독일 스템펠사의 스템펠 가라몬드(Stemped Garamond)와 미국 어도비사의 어도비 가라몬드(Adobe Garamond)가 16세기 클로드 게라몽의 디자인에 가장 충실하다고 평가됩니다.

 

 

베스커빌(Baskerville)

18세기에 등장한 모던한 인물의 모던한 서체

어려서부터 글씨 자체를 사랑한 영국 버밍엄(Birmingham)의 존 베스커빌(Jon Baskerville)은 옻칠 공예를 하여 모은 재산을 투자해 인쇄소를 설립하고, 양질의 인쇄물을 만들기 위한 실험과 출판에 그의 열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과학적 사고와 선견지명을 가진 매우 열정적인 사람으로, 프랑스에서의 ‘왕의 로만‘ 등 진보한 활자 형태의 동향을 의식했습니다.

 15032311190587360_TS베스커빌 서체, 출처: Typography Seoul

1754년, 그가 여러 해 동안 연구해 발표한 서체 ‘베스커빌(Baskerville)’ 은 당시 영국에서 널리 사용되던 ‘캐슬론(Caslon)’ 과는 매우 다른 서체였습니다. 베스커빌은 가로획이 가늘어 굵기의 차이가 두드러지고, 세리프의 모양이 정교하고 일관되며, 글자의 수직성이 강조되는, 고전적 아름다움과 기계적 통일성을 함께 갖춘 서체였습니다.

다소 강한 시각적 질감과 높은 가독성이 특징인 캐슬론에 익숙한 영국의 독자와 전문가들은 베스커빌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서체뿐만 아니라 가장자리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하던 동시대 출판물과 달리. 양질의 흰 지면에 뚜렷이 인쇄된 검정 활자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베스커빌의 출판 디자인도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15032311190690773_TS존 베스커빌과 베스커빌 서체, 출처: Typography Seoul

 15032311190600347_TS뉴 베스커빌 서체, 출처: Typography Seoul

베스커빌은 개별 글자의 풍부하고 우아한 형태, 적당한 굵기와 소문자 높이 덕분에 오늘날에도 매우 인기가 있는 본문용, 제목용 서체입니다. 베스커빌은 1923년 영국의 모노타입 사(Monotype Corporation)에서 재탄생 시키면서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현재까지 여러 버전의 디지털 폰트가 나와 있으며 그중에서 1982년 미국의 ITC사 에서 재현한 폰트에는 뉴 베스커빌( New Baskerville)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보도니(Bodoni)

이탈리아가 선사한 서체의 꽃

서체 중에는 몇 글자만 늘어놓아도 강한 인상을 풍기는, 향기 짙은 부류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보그(Vogue)> 나 <바자(Bazaar)> 등의 패션 잡지 제호로 오랫동안 애용되고 있는 ‘보도니 (Bodoni) 서체입니다. 세리프 서체에서 느낄 수 있는 고전적 아름다움과 산세리프 서체가 줄 수 있는 군더더기 없는 명료함을 동시에 구현하는 이 서체 ‘스타일’ 영역이 그만큼 크고 대범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15072116071511536_TS패션 잡지 <바자>, <보그> 로고에 적용된 보도니, 출처: Typography Seoul

보도니는 이탈리아 파르마(Parma)의 서체 디자이너 잠바티스타 보도니(Giambattista Bodoni) 가 18세기 후반에 디자인한 그의 첫 독창적 서체입니다. 그는 주로 프랑스에서 수입된 피에르 시몬 푸르니에(Pierre Simone Fournier) 의 서체와 인쇄 장식 등을 모방했으나 형태적으로 진일보한 디자인으로, 타이포그래피 역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보도니는 가는 가로획과 굵은 세로획이 직각으로 만나고, 글자의 모양과 비례가 수학적으로 고려된 새로운 미의식이 유럽에 도래함을 보여주는 서체입니다. 머리카락같이 가는 세리프(Hairline serif) 와 굵은 획의 극단적 대비는 당시 전반적으로 발달한 인쇄술에 힘입어 가능했습니다.

보도니는 프랑스 대혁명 후 변화한 시대에 걸맞는 형태적 참신함으로 19세기까지 널리 쓰였으나, 본문용 서체로서 가독성의 문제, 유럽의 전반적 인쇄 수준의 저하로 말미암아 점차 인쇄물에서 사라졌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유럽의 주요 활자 주조소에서 보도니를 재현해 내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현재 디지털 폰트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중 본래 보도니의 형태와 정신이 가장 잘 재현된 폰트는 1924년 독일의 바워(Bauer)사에서 되살린 보도니로, 획의 굵기 간 강한 대비와 우아한 글자의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보도니는 강한 시각적 인상 덕분에 제목용 서체로 사랑받아 왔지만 활자의 굵기 대비가 눈을 피곤하게 하는 단점 때문에 장문의 텍스트에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15072116071576146_TS보도니체의 원형, 출처: Typography Seoul

15072116071509371_TS바우어(Bauer) 사에서 리디자인한 ‘바우어 보도니, 출처: 핀터레스트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는 도전이 1990년대 미국의 폰트 회사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1994년 미국의 ITC사와 1996년 에미그레사 등의 여러 회사들이 시도하였으나. 그러한 서체들에서는 본래 보도니의 특성이 매우 밋밋해졌습니다.

20세기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에서 보도니가 지닌 ‘카리스마’를 자신들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로 삼은 디자이너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우선 러시아 출신으로 30년대 유럽의 모더니즘을 이국의 디자인계에 전해준 알렉세이 브로도비치(Alexey Brodovitch)가 있습니다. 그는 1934년부터 20년 이상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의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는 동안 사진, 이미지, 서체, 여백의 혁신적인 지휘를 통해 당시 편집 디자인의 수준을 한층 끌어올렸습니다. 특히 모더니스트로서 여백을 적극적인 요소로 활용하고 강한 대비 화면을 창조하기 위해 뚜렷한 인상의 보도니를 그의 타이포그래픽 디자인의 주역으로 삼았습니다.

그 외 비넬리 디자인 이나 셔마이에프 앤 가이스마 등의 디자인 회사 포트폴리오에서도 아름다운 보도니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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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어 보도니와 지암바티스타 보도니, 출처: Typography Seoul

 15072116071518507_TS보도니체 활용사례, 출처: Typography Seoul

 

헬베티카(Helvetica)

20세기 공식 서체

스위스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몇 가지를 말하자면 순백의 알프스, 빨간 바탕에 흰색 십자가 국기의 간결함과 명쾌함, 정치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 발달한 시계 산업이 말해주는 정확함과 정교함, 스위스 아미 나이프(Swiss Army Knife)가 구현하는 실용주의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스위스적 특성과 장점을 글꼴이라는 형태에 장전하고 전 세계를 이롭게 한 서체가 있습니다.

 캡처출처: Albums

 다운로드출처: 브런치

바로 헬베티카(Helvetica)입니다. 헬베티카는 그 이름에서부터 스위스의 향기를 강하게 풍깁니다. 스위스 민족의 조상은 캘트족의 한 갈래인 ‘헬베티아(Helvetia)’족이며, 스위스의 옛 이름은 ‘헬베티아’ 였습니다. 헬베티카는 스위스 모더니즘과 동일시되는 서체입니다. 스위스 모던 타이포그래피 양식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꽃피었으나 그 형태와 정신의 씨앗은 1920, 30년대의 신 타이포그래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헬베티카의 형태적 원조 또한 신 타이포그래피의 주요 서체인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입니다. 신 타이포그래피는, 소수의 특권층이 아닌 다수에게 전달될 수 있는 예술이라는,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을 둔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디자이너 개인의 취향과 스타일이 배제된 중립적 성향의 산세리프 서체 사용이 권장되었으며, 디자이너 미상의 19세기 서체 ‘악치덴츠 그로테스크’가 새로운 조형 운동의 서체로 선택 되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의 스위스 모던 타이포그래피 양식은 디자이너의 주관적 해석이나 시각적 스타일보다 전달해야 할 내용의 객관적 해석과 명쾌하고 효율적인 전달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한 형태적 방법론을 제시해 설득력을 더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진, 그림, 텍스트, 캡션 등 서로 관계를 가지는 다양한 시각 전달 요소에 유기적 통일성과 질서를 부여하는 그리드 시스템과 가장 간결한 글자 형태이면서 높은 가독성이 있는 헬베티카는 스위스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전도사가 되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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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ypography Seoul

헬베티카는 특히 60~70년대에 붐을 이루던 다국적 대기업들의 시각적 아이덴티티 구축에 대거 사용되었습니다. 과장이 없는, 매우 중립적이면서 가독성 높은 헬베티카의 형태는 정확하고 정교하며 신뢰로 연결되는 이미지 덕분에 뉴욕, 도쿄 등 대도시의 지하철 사인으로부터 아메리칸 에어라인 등 항공사의 아이덴티티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대상과 영역의 구분 없이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마이클 벤더빌(Michael Vanderbyl)은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헬베티카는 하나의 서체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었다.” 라는 말로서 당시 헬베티카가 점령하고 있던 시각 환경을 짐작하게 했습니다. 라이노 타입 사의 통계에 따르면 헬베티카는 현재에도 가장 많이 팔리는 서체라고 합니다. 국적과 계층을 초월하여 모두를 위한, 모두를 이롭게 하고자 했던 모던 디자인의 정신을 실천한 서체가 바로 헬베티카가 아닌가 싶습니다.

 

helvetica-light-to-thick-2  출처: Gigaom

 

퓨추라(Futura)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실현한 서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서체 중 하나인 퓨추라(Futura)는 그 이름과 같이 영원히 ‘미래를 지향하는’ 현대적인 이미지를 가진 서체입니다. 퓨추라의 탄생은 20세기 모던 디자인 운동, 그중에서도 독일의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와 관계가 깊습니다.

 

 

Futura출처: Identifont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비록 14년간 운영된 학교였으나 그 존재의 파장은 아직까지 미국 동부의 디자인 대학 커리큘럼 속에서 발견될 정도로 큽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이념은 창립 초기의 ‘예술과 공예의 조화’에서, 전성기엔 ‘예술과 기술의 융합’ 으로 진화했으며, “예술가적 교육을 받은 디자이너만이 기계가 만들어내는 차가운 제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학장의 신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식이 있는, 논리적인 디자이너의 양성에 힘썼습니다.

퓨추라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바우하우스의 타이포그래픽 공방 교수이던 헤르베르트 바이어(Herbert Bayer)가 디자인한 유니버셜(Universal)이라는 실험적 서체였습니다. 퓨추라와 함께 1920~30년대에 걸쳐 등장한 기하학적 산세리프 서체들은 루돌프 코흐의 카벨(Kabel), 야곱 에르바의 에르바(Erbar), 미국 디자이너 월리엄 디위긴스의 ‘메트로(Metro) 등이 있습니다.

다운로드 (1)출처: 브런치

기하학적 산세리프 서체들은 60년대에 들어 유니버스, 헬베티카 같은 덜 기하학적인 산세리프 서체들이 유행하기 전까지 매우 인기 있었다고 합니다. 장식을 모두 거둬낸 기본 글꼴이 주는 아름다움과 고전적 서체에 바탕을 둔 변화무쌍한 글자의 폭이 만들어 내는 흥미로운 리듬은 시대와 유행을 초월하여 지속되는 퓨추라만의 특성입니다.

다운로드출처: 브런치

다운로드 (2)출처: 브런치

독일 모던 디자인을 대표하는 서체로서, 오랫동안 자동차 제조회사인 폭스바겐사의 기업서체로 사용되고 있으며, 현대적 형태나 기능을 강조하는 조직의 대표적인 얼굴로, 또 메시지를 전달하는 목소리로 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내고 있습니다.

 

길 산스(Gill Sans)

가장 영국적인 서체

에릭 길(Eric Gill)이 1927년 세상에 선보인 서체 길 산스(Gill Sans)는 당시 유행하던 산세리프와 기하학적 형태를 주된 방향으로 삼으면서도 고전적 서체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 글자의 모양과 비례를 그대로 계승해 산세리프의 간결함과 세리프의 우아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서체입니다.

 15032700152308941_TS출처: Monotype recorder

세리프와 산세리프의 융합이라는 콘셉트는 에릭 길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길 산스는 1910년대에 영국 캘리그래피의 명인이던 에드워드 존스턴(Edward Johnston)이 런던 지하철 사인 시스템을 위해 디자인한 서체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존스턴의 서체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 서체를 바탕으로 만든 산세리프 서체였으며, 1980년대에 영국의 디자이너 콜린 뱅크스가 현대의 사용요구에 맞게 보완해 뉴 존스턴(New Johnston)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런던 지하철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미 이름난 조각가이자 돌에 글자를 새기는 전문가였던 에릭 길은 당시 영향력 있던 교육기관, 센트럴 스쿨 오브 아트 앤 크래프트(Central School of Arts and Crafts)에서 에드워드 존스턴에게 캘리그래피를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존스턴의 새로운 콘셉트의 산세리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이 가진 글자 디자인에 대한 경험과 감성으로 길 산스를 완성 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15032700152341813_TS출처: Monotype recorder

15032700152368239_TS 15032700152385003_TS출처: Monotype recorder

 15032700152321564_TS출처: idsgn

15032700152315648_TS산업 전반에 다양하게 쓰이는 길 산스 체, 출처: idsgn

그 후 길 산스는 타이포그래퍼 얀 치홀트를 비롯한 전문가들에게 20세기 산세리프의 새롭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평가받으며 오랫동안 인기를 누려왔습니다. 길 산스에는 ‘전통을 시대에 맞게 발전시킨 영국다움’이라는 기호가 묻어 나오는 듯합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김하겸

 

  • 참고문헌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33가지 서체 이야기’  (김현미 저/ 세미콜론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