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er가 그로스해킹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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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윤리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눈 앞의 업무를 해치우는 것만도 급급한데 그런 감상적인 시간이 어디 있냐구요? 그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잠시간만이라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지난한 일상을 견디고 일의 보람을 건져낼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이니까요.

패션 디자이너로 재직하던 제가 UX 디자인을 시작하는 데 있어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빅터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었죠. 심미적 가치에만 매몰되어, ‘나의 노력이 진정 세상을 이롭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놓치고 살았던 과거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UXer로 전향했습니다. 그리고는 불과 얼마 전까지, 사용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자기 위로에 취해있었죠. 그러다 다시금 저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Signal & Noise에 게재된 Move Slowly and Fix Things입니다.

이전에 이커머스의 UX팀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데, 그 때 이미 Dark UX라는 개념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해당 주제를 두고 당시 팀원들과 긴 시간 토론을 벌였던 기억도 납니다. 그러다 라이트브레인으로 자리를 옮기고 프로젝트에 매진하느라 까맣게 잊고 살았네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는 좀 더 고민을 진전시켜보자는 취지에 관련된 글들을 찾아 읽고 나름의 정리된 제 생각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UXer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경험을 증진시킨다는 미명 아래 동료 디자이너와 개발자의 노동을 착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구보다 교활한 장사꾼이 되어 사용자의 시간과 집중을 빼앗기도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어두운 측면을 들춰보려 합니다. 실수로, 또는 더 좋은 방안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수익과 성장이라는 임무를 받아 사용자의 경험을 의도적으로 유린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 들어올 때는 네 맘이었지만, 나갈 때는 아니야

가장 유치하고 졸렬하지만 의외로 많은 서비스가 취하고 있는 방법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구독 취소나 가입 해지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집 대문에 ‘신문 사절’이라고 적어 붙인 종이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습니다. 구독을 해지하겠다고 하는데도 끝끝내 신문을 집어넣는 판매방식 때문이었죠. 그러한 방식이 세상이 디지털화 된 뒤에는 좀 더 고도화되었습니다.

• 가입과 결제는 간편하게, 해지는 최대한 번거롭게
말 그대로 해지를 번거롭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최근 많은 디지털 서비스들이 각종 SNS 계정과 다양한 결제 서비스 모듈을 이용하여 가입과 결제 프로세스를 단축시켰습니다. 하지만 해지는 그렇지 않죠. 몇 번의 터치로 가능한 가입과 결제와는 달리, 해지는 반드시 전화나 PC로만 가능하도록 하는 서비스들이 꽤 있습니다.

01[ Melon의 로그인/결제/해지 프로세스 中 ] 로그인과 결제는 간편 로그인과 간편 결제로 진화하였는데 어째서 해지는 이토록 어려운 것인가?

 

• 괜히 긁어 부스럼,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각종 뉴스레터나 홍보성 메일로 꽉찬 메일 계정 하나쯤은 가지고 계시죠?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평소에 필요 없는 메일링은 그때 그때 구독을 취소하면 될 텐데 말이죠. 그런데 기업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애써 찾지 않으면 발견되지 않도록 구독 취소 버튼을 숨겨두는 경우가 잦습니다. 폰트를 작게 쓰거나 바탕과 대비가 적은 컬러를 써서 말이죠. 그리고 때로는 ‘여기’를 누르세요 라는 식으로 대명사를 써서 사용자의 눈을 피해가기도 합니다.

02[Adobe Systems의 홍보 메일 中] 상세내용으로 안내하는 링크와 구독취소 페이지로 안내하는 링크간의 격차는 하늘과 땅 수준!

 

2. 당신이 잠든 사이에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프로그램을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설치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버튼을 반사적으로 누르며 살고 있습니다. 첫 고용계약서나 전세매매계약서에 서명을 하던 순간과 비교해 보면 놀랄 만치 위험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상사가 정신 없이 바쁜 틈을 타서 허술한 결재 문서에 서명을 받아가듯, 우리가 방심하기만을 기다리는 기업들의 얕은 수가 난무하기 때문이죠.

• 눈 가리고 아웅

웹 서핑 중에 최근에 둘러보았던 상품들로 구성된 배너를 보며 흠칫한 적이 있나요? 언제부턴가 바탕화면에 늘어가는 유틸리티 프로그램에 짜증을 낸 적은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바뀐 인터넷 시작페이지는 또 어떻구요.
이러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탓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부주의만 탓할 수 없는 사례들이 꽤 많습니다.

03[ Chrome 설치 프로세스 中 ] 애드센스를 보기 싫은 사람은 무려 3번의 클릭을 더 한 뒤, 이전의 프로세스로 돌아와야 한다.
단, ‘맞춤설정’이 ‘광고의 홍수’라는 말과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을 안다는 전제 하에.

 

04[ 네이트온 설치 프로세스 中 ] 불필요한 설치와 설정을 기본옵션으로 하고서는 트리 메뉴를 닫아놓아 발견이 힘들게 했다.
고작 메신저 설치 쯤이야, 하고 방심하다간 SK그룹에게 컴퓨터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 무한 츠쿠요미, 당신은 이미 내 환술 안에 있다

여러분들과 가장 진지하게 논의해보고 싶은 주제입니다. 강력한데다 죄의식도 적은 방법이며, 심지어 기획자 스스로도 사용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때문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방식이죠. 이런 방식은 대개 서비스 내 체류시간을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애초에 사용자가 목표한 바를 교묘하게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Medium에 게재된 How Technology is Hijacking Your Mind라는 글에서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상황을 잘 예시해놓았습니다. (위 링크의 글을 읽어보시길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어느 저녁에 당신은 친구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근처에 자리를 옮길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합니다. 모두들 모바일을 꺼내 지도나 맛집 앱을 켜는데요. 순간 일행들은 리스트에 있는 식당의 전경과 메뉴를 비교하며 가장 좋은 Bar를 찾기 위해 한참을 보냅니다.”

이 때에 일행들이 사용한 서비스는 ‘대화를 이어갈 만한 곳을 찾으려는’ 사용자의 목표를 충실히 도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의 서두에서 소개한 Move Slowly and Fix Things에는 지나치게 중독적인 요소를 두어 사용자의 관심과 시간을 빼앗는 행위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fb[ Facebook의 스크롤을 이용한 뉴스피드 탐색 인터랙션 ] 엄지로 밀어내는 콘텐츠의 길이가 하루 평균 97m에 달한다는 뉴스피드.
“누군가에게는 하루 동안 걷는 거리보다 길 수도 있겠네요.”

 

06[ Youtube의 다음 동영상 자동 재생 기능 ] 끝없이 재생되는 영상들을 보다 보면, 결국 새벽 5시쯤에 마주하게 되는 콘텐츠들.
“저만 그런가요? 참고로 저 포켓몬고 안 합니다.”

 

07[ Amazon의 상품 상세 화면 내 상품 추천 유닛 ] 상품 상세 화면에서조차 끝없이 상품을 소개하며 탐색을 이어나가길 강요하는 추천 유닛들.
“이게 상품 상세 화면인지 상품 목록 화면인지…”

 

사용자는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동안에 어떠한 물질적, 정신적 이익을 얻을까요? 그리고 그 이익에서 비롯된 만족감이 어떨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지하철에서 모바일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세요. 그들은 별다른 만족감도 없이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 아님 더 나은 거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용자들이 순간의 유혹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은 것을 반성하며 그 습관을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인생을 낭비하게 하는 서비스들에게 어떤 태도를 지니게 될 지 고민해볼 일입니다.

오늘 소개한 여러 사례들은 UXer의 손을 거쳤든 그렇지 않든 사용자의 경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비록 회사 차원에서 이미 정의된 정책이나 수익모델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해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애초에 페이지뷰나 체류시간과 같은 지표가 무엇을 측정하기 위해 마련된 것인지를요. 그리고 우리는 지표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는 점도요.

08
끝으로 UX MATTERS에 게재된 The Ethics of User Experience Design의 마지막 문단을 소개하며 마칩니다.
바로 공상과학 작가인 Isaac Asimov가 만든 로봇에 관한 3가지 규칙을 UXer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1. UXer는 사용자를 해치거나, 방치하여 피해입지 않도록 한다.
2. UXer는 제 1법칙에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업무적인 요구를 만족시킨다.
3. UXer는 제 1 법칙이나 제 2 법칙을 지키도록 애쓰면서 그 자신의 경력을 개발해야 한다.

 

– UX1컨설팅 그룹 이재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