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미술공예운동의 시작점, 레드 하우스와 윌리엄 모리스

12. 미술공예운동의 시작점, 레드 하우스와 윌리엄 모리스

12. 미술공예운동의 시작점, 레드 하우스와 윌리엄 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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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는 미술공예운동의 대표적 건축물 <레드 하우스>와 운동의 창시자인 윌리엄 모리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레드 하우스는 그 당시 미술공예운동의 주역들이 모두 모여 지은 상징적 건물입니다. 건축은 필립 웹이라는 디자이너가 도맡았습니다. 필립 웹이 가장 중요시했던 것은 바로 토착 양식의 활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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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레드 하우스의 정원에 있는 우물은 종종 장식을 위해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집에서 오래전부터 써오던 유서 깊은 것입니다.
레드 하우스는 과거로 부터 내려오던 부산물들을 인공적으로 변형 하지 않고 기존의 사회,역사적 맥락을 잘 살려 조화를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레드 하우스에 적용된 여러 구성물에서 보이는 토착 양식의 활용은 버네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버네큘러는 간단히 말해서 풍토적이고 지역성이 짙은 문화를 말합니다. 예컨대, 어떤 공간에 지역적 관습과 시간적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자연적 부산물이 있고, 부산물을 응용해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한 개인 디자이너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집단과 지역의 산물이며 자연스럽게 발생한 고유한 형태의 문화유형이 됩니다. 그래서 버네큘러 디자인은 디자인 과정이 불투명하고 익명성을 띄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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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네큘러는 전문적 디자인을 대중이 만든 디자인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가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즉, 변방의 보잘것없는 디자인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위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로 쓰기도 합니다.)
전문적인 디자인은 일반인의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디자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앞서있다는 편향된 권위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관점”에서 버네큘러 디자인은 진정한 디자인의 정의를 구현한 것이고,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 사람들이 행하는 생활양식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무엇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인지를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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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미지속에 등장하는 파란 드럼통은 Q_Drum이라는 적정 기술이 적용된 디자인 입니다.
몇 해전 물을 길으러 2시간을 걸어야 하는 아프리카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소개된 Q_Drum에 의해 공공디자인, 사람을 위한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흐름을 타고 2007년도에 뉴욕 맨해튼 어페이스트에서는 이색적인 전시회가 열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색적인 전시회의 주제는 바로 ‘90%의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입니다. 여기서 90%의 사람들의 의미는 저개발 국가, 장애인, 빈곤층 등 소외된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실용성보다는 미적 감수성을 중시한 것들이 많아 상위 10%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기존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전시회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깨는 적정기술을 이용한 디자인을 만날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였습니다. 적정기술이란 쉽게 말해 개발도상국이나 산업화가 진행된 국가 중 소외된 지역에 유용한 기술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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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기술이 향하는 지점은 그 사회 공동체의 정치, 문화, 환경적 조건들을 고려하여 지속 가능한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로 삶의 질에 일정 부분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앞서 말한 레드하우스의 예와 같이 완전히 새로운 소재로 만들어진 디자인이 아닌 그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부산물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지속가능한 지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한마디로 적정기술이란 빈곤층, 저개발국가의 사람들과 같은 인류의 90%를 위한 또 다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정기술이 처음 생긴 것은 1960년대 경제학자인 슈마허로부터입니다. 슈마허는 제3세계의 빈부 격차가 점점 심해지는 것에 대해 고민하던 중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의 적정기술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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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은 한스 헨드릭스라는 디자이너 입니다. 한스 헨드릭스는 아프리카 주민이 물을 구하기 위해 무거운 양동이를 이고 하루에 수 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적정기술을 이용해 앞서 말한 Q_Drum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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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Q_Drum입니다. 적정기술을 이용한 대표적인 디자인으로 꼽히는 제품입니다.
무거운 양동이 대신 아프리카내의 폐자재로 만들어진 이 Q_Drum을 이용하면 식수 75L를 어린이 혼자서도 쉽게 굴려 운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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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땡볕에서 물이 가득 든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수 킬로미터를 다녀야 했던 아프리카 전체에 Q_Drum은 분명 삶의 질적 차원에서 일정 부분 공헌을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아이들은 학교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고 합니다.
Q_Drum을 보면 꼭 빛나는 재료가 아니더라도 디자인이 삶의 질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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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운동의 시작점인 레드 하우스에서는 어떠한 삶의 질적 측면을 고려했을까요?
레드 하우스의 건축가 필립 웹은 가파른 붉은 타일 지붕, 납틀을 붙인 창, 그리고 아치형 문간은 모두 고딕적 양식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지만, 실내는 완전한 동시대의 그것으로,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가정생활을 위한 실용적인 요소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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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공간의 조형과 자연광의 수용은 전통적인 빅토리아 양식으로 지어진 그 당시 대부분의 주택으로부터 교묘하게 결별을 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레드 하우스의 장식에는 상당수의 라파엘 전파와 미술공예운동 예술가들이 참여하였습니다.
레드 하우스의 장식에 참여한 라파엘 전파란 1848년 영국의 화가 로제티, 밀레, 헌트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예술 운동의 한 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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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는 그 시대의 관학적이며 학구적인 예술에 반항한 예술 운동으로, 라파엘로 이전의 이탈리아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찾아내어 면밀하고 사실적인 수법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라파엘전파는 진실과 자연의 영감을 중시하였고 또 장식적 요소의 필요성도 주장하였습니다.
라파엘 전파 주의자들은 회화에 새로운 도덕적, 문학적 중요성을 부여하고 임의적인 규율을 무시하며, 자연을 직접 스케치하고 새로운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도상을 발전시킨다는 혁신적인 욕구 외에도 새로운 기법을 고안해냈습니다.
물에 젖은 흰 바탕 위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특이한 광채를 가진 밝은 색채를 장식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옥외 모티브를 점으로 스케치하는 것, 그리고 시적 상징주의 등이 그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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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전파의 창시자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창문에 끼울 스테인드글라스와 벽의 회화 장식, 그리고 가구를 맡았으며, 영국의 도예가 윌리엄 드 모건은 도기를, 윌리엄 모리스 자신은 벽지를 제작했습니다.
정원은 윌리엄 모리스가 집에 ‘옷을 입히려는’ 의도로 만든 것으로, 집과 주변의 들판을 교묘하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레드 하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고상한 작품으로 집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시다. 하지만 주거공간으로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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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타일 패턴,William. D. Mo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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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Iznic 도자기, William. D. Mo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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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도 미상, 울 테피스트리 쿠션, William Morris>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미술공예운동은 전유럽에 걸쳐 장식예술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서막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장식예술은 진부해지고 그 양식과 장인의 기술, 대중의 기호수준이 저하된 데 불만을 품은 의식있는 사람들이 1860년경에 이르러 늘어나게 됩니다.

위의 미술공예운동의 작품들은 그러한 저항의식을 가진 그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입니다.
위의 세 작품을 보고 단순히 스타일적으로 정의를 내려 본다면 엔틱 스럽지 않은 엔틱스러움이 느껴집니다.

레드 하우스에서도 나타나듯 미술공예운동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소박하며 전원적입니다.
또한 꾸밈없고 단순하지만 정감이 갑니다. 그 당시 산업화로 대량생산되던 빅토리아 스타일의 가구에서는 장인들의 따뜻한 정성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화려한 기교를 보여주는 그런 멋없는 공예품이 아니라 시간이 들더라도 한조각 한조각 정성스럽게 다듬는, 그래서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공예품들이 이 시대에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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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가구는 대표적인 미술공예운동의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처럼 억지로 나무를 휘어 곡선을 만들지 않고 나무의 원형을 최대한 살려 만들어 냈습니다.
얼룩진 나무결을 그대로 무늬화 해 디자인 한 것은 빅토리아 시대와의 분명한 스타일적 차이점을 보여주는 부분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빅토리아 스타일에서는 감추려고 했던 나무의 결함적 부분들을 과감하게 돌출시킴으로써 오히려 장식성을 띌 수 있게 바꾸었습니다.
실용적이지만 미적 감각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내에서의 다분히 미술공예적인 해결 방안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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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중심에는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가 있습니다.
그는 Morris & Co.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장인들이 손수 제작한 소박한 가구와 이에 어울리는 벽지, 쿠션, 커튼 등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미술공예운동이라고 불릴만한 커다란 사상적 흐름이 생깁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영국의 공예가이며 시인이며 사상가입니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의 영향으로 중세를 동경했고, 산업혁명이 가져온 예술의 기계화, 양산화의 경향에 반발하여 순수한 소재, 성실한 손작업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했습니다.
1861년, 그의 공예적 주장의 실천으로서 친한 동료들과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를 설립합니다.
1874년,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는 모리스 상회로 바뀌게 됩니다.
이 시기의 윌리엄 모리스의 사상 및 작품은 예술공예운동을 주도했고, 아르누보의 성립에 영향을 주는 등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던 반면, 산업혁명의 성과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부정적이어서, 지나친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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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 기네비어 왕비, William Morris>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가이자 뛰어난 문학인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평소 독서하기를 좋아 했고 건축가라는 직업 외에도 시인, 공예가라는 다양한 직업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방면의 관심은 뛰어난 동료를 옆에 두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찰스 킹즐리, 존 러스킨, 번 존스, 가브리엘 로세티, 필립 웨브, 그리고 그의 아내 제인 버든 까지 훌륭한 동료들과 작업했고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한 동료 가브리엘 로세티와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 제인 버든간의 불륜으로 결별해야 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고 그 후 그는 힘든 여정을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슬픔을 딛고 훗날 그는 정치활동, 출판활동, 화가로서 활동영역을 넓히며 예술계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동료 예술가들은 공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바로 산업혁명이 상품의 질과 디자인을 모두 퇴행 시켰다고 느낀 점 입니다.
그러한 인위적인 모순에서 탈피 하고자 윌리엄 모리스는 형태ㅡ기능ㅡ장식의 자연스러운 일체화를 통해 간결한 형태와 꾸밈없는 선형을 추구했습니다.

밑의 이미지들은 윌리엄 모리스가 제작한 벽지 디자인입니다. 그가 디자인한 것들에는 멋스러운 소박함이 존재하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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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는 예술작품 자체의 질에 관심을 갖는 동시에 이들 제품이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이들을 만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관심을 뒀습니다. 또한 그는 끝도 없이 계속되는 노동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기술적 디자이너와 공예적 디자이너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위의 입장은 윌리엄 모리스가 가진 예술에 대한 대표적 생각입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렇게 예술에 대한 입장을 크게 본질, 방법, 그리고 노동의 측면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래는 윌리엄 모리스가 생전에 남긴 말을 그대로 인용해온 부분입니다. 이 인용문에서 그가 가진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조금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제 견해는 예술가와 기술적으로 장인(공예가)이라고 불리는 사람 사이에 일을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실질적으로 하나인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기술을 연구하는 시설을 제공하는 데에는 주요한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아무리 독창적이라 하더라도 디자인이 융성하던 과거 시대에 만들어진 예술작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옛 모범을 연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자연에 관한 면밀한 연구로 그것을 보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분명 일종의 무미건조하고 관습적인 디자인 방법에 빠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백하게 표절이라고 비난을 받는 디자인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옛 모범을 다루고 그것에서 장점을 빼내려면 상당히 독창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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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을 보면 첫 번째로 노동의 문제가 떠오릅니다. 19세기 말 산업혁명 직후 영국의 노동조건은 끔찍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12~18시간 가량의 노동시간과 정제되지 않은 석탄가루,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하여 자연사보다, 사고사와 과로사가 많았습니다.
아동들에게도 과도한 노동이 부여되었고 최초로 노동을 시작했던 나이는 7세 전후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락한 장인과 공예 분야의 부활을 예술과 접목해 노동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는 윌리엄 모리스 특유의 재기 발랄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이 방식은 훗날 독일로 넘어가 바우하우스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두 번째로 공예의 본질적 측면입니다.
공예의 본질은 옛 모범을 새롭게 잇는 것입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논어 <위정>편의 대표적 표현이 있습니다.
옛것을 이어 새롭게 이어가야 선생이라 할 수 있다는 공자님 말씀입니다. 윌리엄 모리스와 공자의 관계는 제쳐 두더라도 그 의도는 거의 같습니다.
먼저 옛것의 모범을 연구하고 새롭게 바뀐 시대(자연)를 접목해 옛것의 잘못된 관습을 타파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이어가는 것이 바로 예술과 공예의 통합이 취해야 할 본질입니다.

 

마지막으로 방법의 문제입니다.
예술가의 창의성과 장인의 기술이 합쳐진 것이 이 당시 윌리엄 모리스가 주창한 새로운 예술적 방법론입니다.
이 방법은 독창적이어야 합니다. 옛것을 취하지만 예술, 공예에 없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니만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성실성과 창조성, 기술력이 모두 뒷받침 되어야 하고 사회적 의식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올바른 방법을 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동과 본질, 방법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마련이며 시대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합니다.

 

19세기는 프티 브루주아(중간계급)의 성장으로 인해 사회가 급변하던 시기로 과거 계급이나 형식이 완전히 무너져 혼란스런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오랜 형식을 버리는 데에만 급급하여 기존의 좋은 전통 또한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법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기력해져 빈민으로 전락했고, 실업이 만연했으며 예술은 오로지 황금만을 쫓았습니다.

 

중간계급은 저급한 취향으로 기존의 고귀한 예술에 마구 손을 대어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었습니다.
자존심 강한 키츠, 로세티, 러스킨 등의 캠프 성향의 예술가들은 이를 참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반항하였고 청년 윌리엄 모리스도 이 그룹에 끼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약한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거의 모두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타협하여 변절한 반면 윌리엄 모리스 특유의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디자인’ 분야를 개척한 것입니다.
그의 비타협적 개척 정신은 중세의 고딕의 정신과 닮아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나 활동이 현재 우리가 느끼는 단순함이나
성실성, 건전함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윌리엄 모리스는 21세기가 아닌 19세기를 산 사람입니다.
당시로써 윌리엄 모리스의 작품들은 대부분 중세적 생각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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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앞서 소개한 레드 하우스로 부터 입니다.
레드 하우스는 윌리엄 모리스의 새로운 전기를 시작하는 계기였으며 미술공예운동의 상징적 서막이기도 합니다.
10대의 막연한 반항시절을 거치고 중세 성직자, 시인, 미술가, 건축가를 오가던 혹은 모두를 겸하던 윌리엄 모리스는 동료들이 품었던 낭만주의적 우울함을 극복하고 실천적으로 나아갑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10대 시절에 엄청난 독서를 했고, 20~30대 시절은 시, 미술, 건축 등의 예술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만난 몇몇 라파엘전파의 친구들은 새로운 시대적 조류에 합류합니다. 20~30대의 예술적 반항이 자신들의 세계안에 숨은 반항이었다면
40~50대의 윌리엄 모리스의 반항은 현실적 반항으로 이어집니다. 회사를 차리고 직접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윌리엄 모리스 특유의 활기참과 자존심은 모리스 회사의 성공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그의 지적토대와 정신은 노동과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정치적 대중 강연을 다니면서도 예술과 노동에 대한 끊임없는 찬사, 그리고 그의 강연노트 뒤쪽에는 항상 새로 작업할 패턴에 대한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윌리엄 모리스는 정식으로 예술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며 길드나 공방 출신도 아닙니다.
그의 이러한 성장 배경은 당시 사회 전반에 만연하던 예술의 천재성에 의존한 직업예술을 생활예술로 바꾸는 커다란 계기가 됩니다.
현재 미술대학이나 예술대학은 실기시험을 봅니다. 또한, 예술적 소양을 중시하고 천재적 예술, 새로운 신화를목표로 합니다.
반면 윌리엄 모리스가 추구한 예술은 재능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약간의 총명함만 있으면 누구나 예술가 및 공예가의 자질이 그 내면이 있다고 당연시 여겼습니다. 이는 예술의 또 다른 측면, 보편성, 공공성, 민주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기존의 예술과 윌리엄 모리스가 주장한 예술이 완전히 갈라집니다. 즉, 윌리엄 모리스가 의도한 예술과 공예는 천재적 재능을 담는 그릇이 아닙니다.
윌리엄 모리스의 그릇에 담긴 것들은 보편적인 예술 즉, 생활속에 녹아든 삶의 질적 차원을 향상하는데 기여하는 매우 실질적인 것들입니다.
혹여나 제가 집 앞 환경을 위해 꽃을 심고 청소를 하며 칠이 벗겨진 곳을 페인트로 채워넣는 따뜻한 마음가짐을 가진 디자이너라면 윌리엄 모리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인재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인지 윌리엄 모리스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그의 소박한 인생과 오롯이 닮아있어 삶 앞에 예술을 두지 마라는 한 문학가의 글이 아스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SY Kim[catlist name=”Design History” numberposts=5 excerpt=”yes” pagination=”yes” excerpt_size=”0″ title_only=”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