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헥트로 기마르의 프랑스 파리 메트로폴리탄 디자인을 통해 본 아르누보

19. 헥트로 기마르의 프랑스 파리 메트로폴리탄 디자인을 통해 본 아르누보

19. 헥트로 기마르의 프랑스 파리 메트로폴리탄 디자인을 통해 본 아르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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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이 아르누보와 제일 처음 만나는 지점은 건축이나 미술이 아닌 화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는 파리 지하철 metropolitan 입구일 것입니다. 금주는 헥트로 기마르가 디자인한 메트로폴리탄을 통해 아르누보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답습해 보겠습니다.

 

헥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라는 이름은 파리에서 아르누보라는 장르와 거의 동일시 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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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이야기 한 것처럼 파리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아르누보와의 첫 만남은 화려한 곡선미를 보여주는 메트로의 입니다.
메트로 입구의 형태는 역사적인 양식들을 부정하고 자연형태에서 모티프를 빌어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던 아르누보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의 붉은 램프는 파리의 어느 곳으로라도 빠른 수송을 해준다는 파리 메트로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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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마르가 디자인한 “Metropolitain”이라는 메트로 입구의 타이포 그래피는 파리를 넘어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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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토르 기마르, 1867-1942 >

Metropolitain의 창시자 헥트로 기마르는 프랑스의 건축가 입니다. 그는 아르누보 양식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독자적인 작품을 많이 선보였습니다.특히 그의 주요 작품인 파리 지하철 역사와 앙베르 드 로망 음악당은 철과 유리를 결합해 아름다운 곡선미를 잘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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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베르 드 로망 음악당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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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베르 드 로망 음악당, 1867-1942>

그는 장식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고, 1880년 후반부터 설계를 시작, 아르누보 양식이 유럽을 석권한 시대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선구자적 입장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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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로서 철과 유리라는 생소한 재료를 교묘하게 맞추어 식물적인 곡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아래는 Metropolitain의 자세한 모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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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ropolitain을 제작한 기마르는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에 대해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시 지하철이라는 근대의 새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혀 새로운 재료로 디자인하도록 프랑스 정부에서 허락한 것은 이 당시 시대적인 감각을 잘 나타내는 사건 입니다.
또한, Metropolitain의 세부는 뼈대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곳에서 직선 사용을 거부하는 것과 아르누보에 대한 열열한 지향에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유럽 전역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쳤던 아르누보양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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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란 ‘신 예술’이라는 의미 이며 아르누보라는 말은 영국과 미국에서만 쓰인 호칭입니다.
독일에서는 유겐트 양식(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양식(Style Guimard),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 (Stile Liberty : 런던의 백화점 리버티의 이름에서 유래)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아르누보는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여 새로운 예술을 수립하려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클림트가 주창했던 시세션 운동에 영향을 준 점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대개 전통으로부터의 이탈, 기계와 기능주의의 탈피, 새 양식의 창조를 지향하여 자연주의, 유기성 등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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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의 건축, 공예가 그 정신적 원형을 그리스, 로마 또는 고딕에서 구한 데 반해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모든 역사적인 양식을 부정하고 자연형태에서 모티프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습니다.
특히, 덩굴풀이나 담쟁이 등의 형태를 연상하게 하는 식물의 유기적인 곡선 또는 화염 무늬 형태 등의 특이한 장식성을 자랑했습니다.
이들은 유기적이고 움직임이 있는 모티프를 즐겨 썼으며 직선적 구성을 고의로 피했습니다. 하지만 아르누보 디자인은 곡면의 접합에 의한 유동적인 미를 낳은 반면, 견고한 구축성이라든가 기능에 기초를 둔 합리성에 소홀하여 사용성을 무시한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인 장식으로 빠질 위험도 컸습니다.
아르누보가 비교적 단명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과도한 장식성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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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의 전성기는 1895년경부터 약 10년간입니다.
그보다 이전인 1880년대에는 영국의 맥머드, 미국의 설리번, 스페인의 가우디 등이 그래픽디자인이나 건축에서의 곡선적인 형태를 사용한 작품들을 발표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매킨토시, 벨기에의 반 디 벨데와 오르타, 프랑스의 헥토르 기마르, 이탈리아의 다론코 등의 작가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게 되면서 아르누보는 널리 그리고 급속도로 세계전역에 보급되었습니다.
특히, 1896년에는 독일의 미술품상인 빙그가 벨기에의 건축가 반 디 벨데에게 의뢰해서 내부장식을 한 파리의 상점은 ‘아르누보관’으로 명명되어
대단한 인기를 얻고 유명해졌는데 이 새로운 양식(아르누보)의 유행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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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관>

한편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1896년에 뮌헨에서 발간된 잡지 “유겐트”에 수많은 젊고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유겐트 양식”이 발생했는데 이것은 아르누보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10년경부터 건축, 공예계에는 기능과 사회성을 장식성 보다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지면서 R.랄리크의 보석 디자인, E.가레의 유리공예, 그리고 미국에서의 티파니의 유리그릇과 스페인에서 계속된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활동 등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서 아르누보는 소멸해 갔습니다.

그러나 종래의 역사주의, 전통주의에 반발하여 클림트가 주축이 되었던 빈의 시세션(secession)을 불러일으키는 등 근대 미술의 확립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점과 윌리엄 모리스의 예술 공예 운동을 계승해 현대 공예계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공예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하나의 거대한 축입니다.
모든 것이 규격화되고 직선적인 기능주의를 빠름의 미학이라고 한다면, 공예란 장식적이며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고 틀이 없는 유기적 구성을 추구하는 느림의 미학에 가깝습니다. 현재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Slow movement’ 운동 대부분은 기능주의에 반발하며 공예의 정신적 토대를 계승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예적 정신의 가장 큰 특징은 환경을 생각하고 최종 완성품 보다 과정에서의 투명성을 우선시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미술공예운동에서 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아르누보와 시세션등의 공예적 맥락을 단순히 곡선적인 양식적 차원에서로 이해한다면 자칫,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후대에 계승해 준 역사적 유산은 곡선의 우아함 보다 앞서 말한 기능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느림의 미학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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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번, 시카고 공회당(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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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 호르타 자택(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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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1884~)>

 

 

–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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