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 25년 차 에이전시 기획자의 넋두리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 25년 차 에이전시 기획자의 넋두리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 25년 차 에이전시 기획자의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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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변(辨)의 시작

윈도우 95에서 파워포인트(오피스 95)로 괴발개발 제안서를 그려보고,
오피스 95의 액세스를 이용해 엉성하기 그지없는 항공 예약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97년 한메일 계정을 만들어 메일질을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툴과 생소한 시스템은 한참이 지나도록 능숙해지지 못했지만,

그것을 통해 접한 세상은 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직업을 바꿨다.

그 후 이 업계에서 25년
내가 속한 조직, 내가 하는 일을 지칭하는 이름이 달라졌고, 일의 범위와 대상도 변했다.
마냥 즐겁지만도 마냥 쉽지만도 않은 이 시간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기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 에이전시의 UIUX 기획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 고민의 단초가 찾아지기를 희망하며 이 끄적임을 시작한다.
이 글은 UI 기술, UX 기교, 디지털 에이전시의 역사…그런 걸 떠나 이 바닥 고인물의 개똥 철학관으로 바라본 넋두리이고, 나를 찾아보려는 몸부림이다.
또한, 특정 상황에 포커싱 되어 토로하는 부분이 있으니, 이 바닥 현상 전체를 동일하게 인지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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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 이 바닥을 돌아보다

나는 서비스 기획자였고, 콘텐츠 기획자였고, UIUX 기획자이다.

 

(내가 속한 이 업계도) 90년대 중·후반부터 이런 식으로 변화(진화?) 해 왔고, 각자 ‘제작자 – 공급자’의 형태를 갖추며, (서로 간 그 역할, 입지가 바뀌는 부분도 있지만) 콘텐츠 계열은 공급자로 에이전시 계열은 제작자로 다른 라인의 이력으로 나뉘어져 갔다.

두 개의 형태는 무언가를 만들어 제공한다는 범주에서는 비슷한 듯 하지만, 실제 만들어 제공하는 개체와 대상이 달랐다. 공급자의 고객은 일반적으로 ‘사용자’라 불리는 사용과 소비의 주체이고, 제작자의 고객은 일을 의뢰하는 공급자가 된다.
일과 돈을 주고 제작자의 노동을 사는 공급자, 우리가 ‘고객’이라 부르는 그들이다.
여기에서 제작자의 고객은 단순 콘텐츠 계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발주하는 일반적인 ‘갑’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에이전시는 ‘제작’에서 ‘제작 < 용역’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자본과 입지에서의 차이는, 도생을 위해 에이전시가 고객의 비즈니스와 이행 방식까지 체크해야 한다는 당위를 성립시켰다.
*자본 : 실제 초창기에는 초기 기반 투자비용을 필요로 하는 공급자 계열에 대기업, 자본이 몰렸고, 그 결과 몸집이 커지며 입지도 빠르게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러 ‘사용자 – 고객 – 에이전시’로 조성된 디지털 서비스 생태계는 그 안에 계급이 존재하며, 이는 누군가에겐 공공연한 터부이다.
이 생태계의 동향은 누군가의 태도를 바꾸게 하고, 관계를 재설정하게 하며, 존재를 부정하게 한다.

작금의 이슈, 트렌드의 키워드는 이 정도쯤이지 싶다.

 

저 텍스트의 의미는

‘핵심 기술, 성과는 고객이 – 단순 노동은 에이전시의 용역이’라는 표면적 역할 설정을 말하나, 나아가 에이전시 내부에서는 인력 활용의 변화와 조직 자체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조직의 퀄리티, 아이덴티티를 위한 자체 역량을 알려야 하는) 마련의 압박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현상들은) 에이전시 입장에서 안정적인 캐시카우 확보가 될 수는 있어도 신규 인력의 유입과 유지, 고급 인력의 확보와 유지에 동기부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에이전시의 경우 글로벌 인력 활용으로 인한 감축, 고급 인력의 필수 확보, 조직 내에서의 인력 관리(품질, 소속감 등)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슬슬 부아가 치밀기도 하지만) 앞으로가 불안하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개인으로서도 조직으로서도 어떻게 대응하고, 변화해야 하는가 – 그간의 운영 방식, 지향점, 구조 모든 게 막 바뀌어야 할 것 같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해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한 것 같은 지금.
그런데 지금에서야 위기가 도래한 걸까?
이미 5년 전, 10년 전, 15년 전, 2000년대 초에도 그런 변화의 예측과 대응을 분석하는 기류는 존재했다.(굳이 그런 자료는 찾아서 넣지 않겠다. 찾아보면 많으니까)

그렇다면, UIUX 에이전시가 더 크게 파이를 키우는 새로운 생태계는 만들어질 수 없을까?
태생 상 UIUX 에이전시는 커질 수가 없는 것일까?
고객사만 바라보며 수주대토하지 않고 자주적 자립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 답은 모르겠지만, 일단 본질을 먼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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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 우리를 마주하다

1)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2) 고객은 왜 우리(UIUX 에이전시 – 경험디자인 분야 업체)를 찾는가?
3) (현 환경, 고객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4) (온전한 본업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UIUX 업무는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유/무형의 인터페이스(시스템)를 설계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또는 새로운 대상, 기술, 삶에 대한 탐구와 더 나은 방식으로의 실현을 연구하고 발굴하며, 이를 위해 낡은 것도 생소한 것도 가치가 있도록 시도를 멈추지 않으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내는 것.
물론 여기에는 제안, 선행, 컨설팅, 구축, 고도화 등의 역할에 따라 조사, 분석, 방향 설정, 컨셉 수립, 프로토타입 제작, 설계, 디자인, 개발, 검수, 안정화 같은 실무적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신념과 업무의 형태가 우리 업을 대표하며, 여기에 시간과 경험이 더해지면서 공고히 이 분야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이 업에 소속된 대부분의 인력은 바로 그 일에 대한 매력으로 유입되었고, 그에 대한 전문성과 역량을 발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고객은 왜 우리(UIUX 에이전시 – 경험디자인 분야 업체)를 찾는가?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고, 고객은 문외한이라 우리가 할 수밖에 없어서’
혹시라도 이런 생각을 했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백만 년 전(이 업의 초기 시절)에는 얼추 맞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UIUX가 일반화, 일상화된 접근법으로 자리 잡은 지금, 고객도 지식적, 개념적으로 잘 알고 있다. 대체로…
그렇다면 왜?
자기가 하기 귀찮아서? 하찮은 일 시키려고? 인건비 줄이려고? 운용 효율성 때문에? 자기 직원보다 다스리기 용이해서? 사람이 부족해서?
물론 그런 것들도 맞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점이 더 큰 이유이지 않을까?
자신들도 답이 없어서!
‘스스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실행 오류를 줄일 방법이 필요하거나, 현실적 업무 수행의 전문성, 숙련도가 부족하거나’ 라서가 더 근본적 이유일 것이다.
즉, 개념이나 접근법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실제 실행, 이행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를 찾는다는 것이 현실적 관점이지 싶다.
높은 역량, 창의적 사고는 개인별 소양이나 노력으로 따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경험 측면은 시간과 실무의 관여가 X, Y 축을 따라 축적되어야만 가능하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핵심적이고 높은 역량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각종의 이유로 고객 스스로가 리딩하거나 답을 낼 수 없는 것이라 맡기는 것이다.

*선후가 다르다.
*이 선후의 다름에는 ‘주인이 부족해서 똑똑한 개를 찾는 게 아니라, 똑똑한 개가 주인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한다’는 숨은 뜻이 있다.

앞서 던진 우리의 대단한 착각이 이 선후를 왜곡하게 만든다.

 

3) (현 환경, 고객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술은 발전하고, 우리의 전문분야는 축적된 경험과 창의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UIUX – 경험디자인’인데, 핵심 기술과 성과는 고객이, 우리는 단순 노동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명료하고 매뉴얼화, 전자화 할 수 있는 부분은 AI, 저렴한 글로벌 인력을 쓰는 것이 낫다.
기술의 발전과 인력의 쏠림, 비용의 흐름(경제적 가치에 의해서)이라는 상황과 근거가 분명하기에 고객의 선택과 우리의 처지에 납득을 할 수밖에 없지만, 실상은 단순하지가 않다.
방금 말했듯이 매뉴얼화, 전자화할 수 있는 부분, 되어 있는 업무는 그러면 된다.
하지만, 그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보다 높은 역량을 필요로 하는 인력이, 높은 역량을 필요로 하는 본래의 일과 다른, 대체가 가능했어야 할 업무와 수습까지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이 UIUX 기획자를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이탈하게 만든다.(물론 조직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별개로)
왜 이런 것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이탈을 하게 만드느냐고?
우리는 UIUX 기획자이지 SI, SM 엔지니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의 이유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4) (온전한 본업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일을 합니다. 서로 간 예의를 지키고 존중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을까
‘우리는 이런 일을 합니다. 말씀하신 업무는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없을까

——-(침묵)…

그러기 어려운 현실에 가슴이 답답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어야 그다음도 있을 테니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외형적, 규모적으로 평등한 공생관계는 없다.(악어와 악어새, 상어와 빨판 물고기, 개미와 진딧물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가치와 역량으로 입지를 올리는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철학, 비전, 이념… 사실 이제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철학적이고, 인간적이고, 고결하고, 창대한 것인지는 크게 관심 없다.
국내외 탑티어 기업들의 메시지가 무엇이든 그들은 결국 핵심 사업 부분을 잘하고 있고, 거기에서 성과가 나기 때문에, 그 외의 것들의 포장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막말로 돈을 잘 벌려면? 단가가 비싼 일을 하면 된다.
창의적인 것, 전문적인 것 그런 것 보다(그런 건 절대적인 기준과 평가가 어려우니), 남한테 일 시키고 관리하는 조직도 가능하겠다.
프로젝트 별 전체 범위 중 인력 비중은 적은데 단가가 월등히 높고, 여러 개를 운용할 수 있을 테니 수익성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형태를 UIUX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까?(SI, SM 모델로밖에 안 여겨진다.)
정체성이 사라진다면 그 조직은 핵심 자산을 잃을 것이고, 거기에 어떠한 철학이나 이념을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에게) 다행인 건, 아직 많은 에이전시들이 각자 특화된 강점을 만들고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케팅, 모션 그래픽, 온오프 믹스, 토탈 커버(기획 – 디자인 – 퍼블리싱 – 개발), 신기술/신사업 레퍼런스 강화, 경험디자인적 컨설팅과 같은 업무 부분과 클라우드, 쇼핑몰, 랩, 고객사와의 업무 영역 특화로 확실한 캐시카우 확보 등 (별도의) 사업 부분으로 양쪽에서 특화하고 강화하고 있다.

전문 분야에 대한 경쟁력이 있으려면
무언가 새롭고 특이한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는 마음을 잠깐 내려놔봐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나만, 우리만 할 수 있는 건 없다.
처음에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것도 금방 따라 하고 익숙해지니까 말이다.
그런 것보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하는 게, 더 많은 것이 먹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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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나는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가

이 일의 시작에는 눈을 촉촉하게 하고 볼을 발갛게 달구는 흥분이 있었다.

– 멋있을 수도 있지만, 재밌어서
– 힘들지만, 뿌듯해서
– 겁나고 두렵지만, 심장이 두근거려서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는 UIUX 기획자 그 존재가, 그 일이 좋아서 그 시간을 버텨내었다.
이 업이 계속되고 그 안에서 내 역할이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예전에는 아직 자리잡지 못한 후임들의 백그라운드가 될 수 있다면,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겠다 여겼고
그다음에는 그 후임의 또 다른 세대가 합류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되는데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사람들은 아직 가 보지 못한 걸음에 두려움이 있고, 그 앞에 누구라도 존재한다는 것에 ‘나만이 아니’라는 위안이나 가 볼 만한 용기를 얻기 때문에, 거기에 서 있는 존재만이라도 되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것이 흘러가고 밀려오는 사이, 외부 환경만 변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문화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시절도 변하고, 세대도 변했다.

나는,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어떤 길을 내야 할까? 어떤 자리에서 멈추어야 할까?
25년 차 기획자의 끝나지 않은 고민
UIUX 기획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을 찾지 못했다.

 

– 라이트브레인 가치UX그룹 김호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