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HELVETICA 서체에 얽힌 다양한 문화 및 정치에 관한 이야기

이번 주는 지난주에 이어 HELVETICA에 얽힌 다양한 문화 및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내용 중 몇 부분은 영화 와 얀치홀트의 저서 <신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이론가 이지원 씨의 글에서 인용 내지 발췌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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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www.design.co.kr)

글꼴은 여러 사람이 지속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노출되는 방식이 다른 그래픽과 다릅니다.
다른 매체 디자인, 예컨대 책이라든지, 포스터, TV광고, 간판 등이 그 자체로 결과물이 되는 것과 달리, 글꼴은 여러 다른 그래픽의 재료가 되고자 하는 독특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그래픽 디자이너는 자신이 쓰게 될 글꼴에 관해 어지간히 까다롭게 굴기 마련입니다. ^^
하물며 글꼴 디자이너가 더욱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대어 글꼴을 평가함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까다롭게 파편화된 디자이너의 취향에서도 HELVETICA는 일종의 기준선을 그어 줍니다.
포스트 모던을 너머 얼터모던으로 향해 가는 우리 디자이너들에게 타이포 그래피의 원칙보다 선행되어야 할 덕목은 보다 다원적이고 절충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혼성 스타일의 그래픽이 난무하고, 전 세계 문화가 뒤죽박죽 섞이는 시대에 지역적, 역사적 사실에 엄격한 타이포그래피는 오히려 보기에 공허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나치의 국민서체였던 ”프락투어”나
영국의 유서깊은 일간지 <더 타임즈>를 위한 서체 “타임스 로만”은 내용 이전에 서체의 정체성이 선행되곤 합니다.
실제로 9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의도적으로 형태에 담긴 역사성을 왜곡하거나 스타일이 혼재하는 서체가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것이 하나의 서체 디자인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나단 반브룩의 <바이러스 폰트>. 루디 반더란스와 주잔나 리코의 <에미그레>, 제프리 키디등의 서체 디자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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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ilovetypograph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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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에 나오는 빔 크라우벨(Wim Crouwel)은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입니다.
개인적으로 더치디자인의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분입니다. 혹시 더치디자인이 궁금하신 분들은 밑 주소를 클릭해 보시길 바랍니다.
http://www.dutchdesignweek.nl/

그는 명확함을 좋아하며,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할 덕목은 가독성, 직관성이라고 영화에서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그는 그리드 시스템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그리드닉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 거장은 “중립적”이라는 단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며 그에 만족하는 중립적 서체는 HELVETICA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내용에 서체가 있어야 하지, 서체에 내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덧붙입니다.
아래는 빔 크라우벨의 작업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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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마초같이 생기신 분은 뉴욕의 디자인 전문 회사 펜타그램의 디자이너 마이클 베이르트(Michael Bierut)입니다. 이 분 역시 HELVETICA에 대해 강한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영화 속에서 HELVETICA의 등장 이전의 시각물을 제시하며 엉터리 사진에 스크립트(손글씨)서체를 사용하여 꾸밈이 많은 디자인들을 비판합니다.

HELVETICA이후, HELVETICA를 적용하여 리-디자인한 코카콜라의 지면 광고는 콜라가 담긴 큰 코크 잔의 이미지와 그 아래에 HELVETICA로 간결하게 코카콜라라고 적힌 문구가 있고, 마침표로 끝을 냈습니다.
마이클 베이르트는 이러한 디자인 방법은 아주 명백하며 이런 변화는 모든 과거의 잘못된 디자인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것이라고 찬양합니다.

아래는 마이클 베이르트의 작업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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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설명해 드린 윗 두 분은 HELVETICA의 광적인 팬들입니다. 어느 정도 관점이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많아 보이긴 합니다. 다음은 HELVETICA에 대한 중립적 입장을 펼치고 있는 에릭스피커만(Erik Spiekermann)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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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에릭스피커만의 열광적 팬이라 간단한 약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래는 에릭스피커만이 디자인한 서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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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NA같은 경우는 서체가 가진 세리프의 우아함때문에 국내 브랜딩 회사에서도 즐겨 쓰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분은 1979년 MetaDesign을 설립, 이 회사를 유럽에서 가장 큰 디자인 스튜디오로 성장시켰고, 1989년에는 최초의 메일 주문식 전자 서체 판매숍 FontShop을 설립했습니다. 클라이언트에는 노키아, 보쉬, 뒤셀도르프 공항, 독일 철도청 등 유수한 기업 및 기관이 즐비합니다.

또 활발한 저술활동으로도 유명한데 국내 번역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타이포그래피 에세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표지디자인을 에릭스피커만이 못봤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
이 분은 영화에서 타이포그래피는 말을 시각적으로 명백히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서체는 리듬과 강약, 손맛이 있어야 하는데 HELVETICA는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느낄 수는 없다고 합니다.

PC이후, HELVETICA는 애플의 기본 서체로 쓰였습니다.
당시 Window는 애플을 따라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흐름에 맞추어 기본 서체 Arial이 나오게 됩니다.
에릭스피커만은 영화에서 Arial이 HELVETICA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서체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기본적이며 마치 공기와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에릭스피크만의 말을 비추어 볼 때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간판이나 옥외 광고에서 HELVETICA를 보는 것 만으로 우리는 세계화의 일원이라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느낄지도 모르며, 조금 더 비약해서 말한다면 HELVETICA는 세계화(서구화)라는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일지도 모르는)로 갈 수 있는 모던한 티켓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뉴욕의 레트로 디자인을 이끈 폴라셰어(Paula Scher)는 HELVETICA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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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업을 살펴보면 빈 분리파부터 초기 모더니즘 시기에 유행하던 장식적인 서체들로 지면을 꾸미며,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 보다 타이포그래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1984년 “셰어 스튜디오”를 세우며 그 스튜디오에서 역사적인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며 절충적이고 역사적인 타이포그래피를 성공적으로 결합해 냅니다.
CBS Records

 

이러한 특별한 약력을 지닌 그녀는 HELVETICA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HELVETICA는 기업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기업의 시각 언어는 대부분 HELVETICA의 옷을 입고 있는데 모두 깔끔한 느낌을 풍기고 비슷하여 마치 엄마가 날 청소시키는 듯한 느낌 같다”며 HELVETICA를 부정합니다.

또한, 영화 속 그녀는 HELVETICA의 윤리적 오용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가령 산업폐기물을 지속적으로 버린 윤리적으로 나쁜 기업이 있다고 칩시다. 그 기업의 CI가 HELVETICA라면 그 기업의 나쁜 이미지는 HELVETICA의 모던한 외형속에 침식되어 여타 다른 기업들과 식별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떠올릴때 가장 처음 머릿속에 그려지는 표상은 아무래도 “로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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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HELVETICA의 월남전쟁 당시 남부 베트남 지원도 들 수 있습니다.
월남전쟁 당시 미군을 주축으로 모인 대한민국, 중국,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등의 전투기에는 어김없이 HELVETICA가 쓰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 HELVETICA를 사용하면 외교적으로 미국에 우호적이란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HELVETICA의 모던하고 절제된 외형아래 제 각기 다양한 정치적 목적으로 똘똘뭉친 다국적 세력들은 북베트남의 게릴라들을 토벌해 나갔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직접 서체를 그려라. 그리는 방법에 따라 서체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그렇게 하면 서체 자체에서 그때그때 달라지는 디자이너의 영혼과 기분을 잘 전달할 수 있으며 자신이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HELVETICA에 반대하는 디자이너는 폴라셰어 뿐 아니라 스테판 사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도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스테판 사그마이스터는 외국의 여타 디자이너들 보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후기 작업들은 디자인계에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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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스테판 사그마이스터는 3,4개의 서체만을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아래는 영화속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이러한 법칙은 한 개의 프로젝트를 위한 흥미로운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한 한계를 정하는 연습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적용되는 법칙이라면 이건 마치 글을 쓰는 작가가 항상 나는 3개 또는 4개의 단어로만 쓸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첫째로 왜 당신이어야 합니까?
두 번째로 그것이 정말 일생에서 흥미있는 작품을 산출할 수 있었을까요?”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말은 디자이너가 잊지 말아야 할 끝없는 오리지널리티의 추구에 대한 이야기 인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디자인사 읽기에 제일 처음 소개 되었던 데이빗 카슨(David Carson)의 영화 속 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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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쉬움과 커뮤니케이션을 혼돈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읽기 쉬움이라는 것이 곧 의사소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읽기 쉬운 것이 항상 옳은 커뮤니케이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읽기 어려운 것은 사용될 곳에서 유효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지겹고, 설명도 없어서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영화속 데이빗 카슨은 여러 가지 서체로 쓰인 HAPPY를 벽에 붙여놓고 그 중 HELVETICA로 쓰인 HAPPY를 가리키며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뒤통수를 꽝하고 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이 영화를 보던 시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서체를 선택하며 표현되어야 할 것과 표현되지 말아야 할 것들 사이의 경계에 대해 거의 망각하다 싶을 정도로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저희는 영화와 참고 서적들과 저의 주관을 토대로 HELVETICA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번 주의 제 글에서 HELVETICA의 조형적 사용의 효율성 보단, 모더니즘을 등에 업은 상징적 서체를 대하는 디자이너의 여러가지 태도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HELVETICA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를 내어놓은 대가들은 분명 산전수전 다겪었을 디자이너들입니다.
그들의 말을 경청해 보면 서로 견해가 틀리고 생각도 틀리고 언어도 틀리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이너 자신과 자신이 만들어낸 디자인 산출물과의 닮음에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디자이너가 디자인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나 철학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HELVETICA의 어느 편에 서 있는 디자이너일까? 라고 한 번쯤 자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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