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3부 어바나이즈드, 아이디어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3부 어바나이즈드, 아이디어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3부 어바나이즈드, 아이디어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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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어바나이즈드>는 도시디자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서체에서 시작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인 도시에 이르기까지 점점 확장되어가는 양상을 보입니다.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이야기를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헬베티카>는 서체를 두고 다양한 디자이너의 철학이 충돌하는 지점을 말하고,
<오브젝티파이드>는 디자이너와 디자인된 제품, 나아가 사물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다뤘습니다.

처음엔 디자이너, 그 다음엔 디자인된 제품을 쓰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면 이번엔 도시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 됩니다.
도시는 수많은 문제와 스트레스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과연 디자인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오브젝티파이드>가 스타 디자이너들이 바통을 넘겨주며 달리는 릴레이 계주 같았다면, <어바나이즈드>는 사람보다 공간, 공간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집중합니다.
도시 문제로 신음하면서도 문제를 방치하고 있는 인도의 뭄바이와 실험적인 주거 환경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칠레와 대치시킨 구성은 다소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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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뭄바이의 슬럼 지역
(http://www.rsctravel.com/2013/12/11/india-2003/)

‘슬럼’과 빈민가의 빈곤한 복지로 신음하는 인도의 뭄바이는 인구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주거 환경을 제공합니다.
거리는 차선을 무시하고 질주하는 자동차와 신호등 없는 도로 환경으로 인해 무단횡단과 같은 위법이 만연한 무법지대가 됐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 인근에 위치한 공장들이 배출하는 쓰레기로 인해 땅은 신음합니다.
인도 정부는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에서 소외된 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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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소외계층 주택 프로젝트 ‘엘리멘탈’
(http://www.lafargeholcim-foundation.org/Projects/sustainable-post-tsunami-reconstruction-master-plan-constituci)

반면 칠레는 인도와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소셜 하우징 프로젝트 ‘엘리멘탈’을 통해 소외계층을 도심으로 불러왔습니다.

그가 택한 문제 해결 방식은 이들에게 사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스스로 자립하도록 돕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보편적으로 정부의 소외 계층 주택 사업이 교외에 자리 잡는 것과 반대로, 도심으로 그들을 데려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쪽을 택했습니다.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건축가가 실제 거주할 시민들과 함께 디자인했다는 점입니다.
건축가는 거주할 사람을 고려하며 디자인하지만, 앞으로 거주하게 될 시민 만큼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거주 예정자에게 여러 가지 요건을 제시하고 시민들이 직접 선택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온수기와 욕조 중 한 가지 밖에 제공할 수 없는 여건이라면 건축가들은 ‘온수기를 선택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실제 거주할 시민들은 욕조를 선택했습니다. 온수기가 있어도 가스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건축가들은 이러한 시민들의 판단을 존중하여, 그들의 선택에 따른 공간을 디자인하되 추후 증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둡니다.

건축가들이 남긴 증축의 여지가 상징하는 것은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소외된 계층도 꾸준히 노력하면 더 좋은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들을 사회의 그림자가 아닌 밝은 빛으로 불러오는 듯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도시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단순히 집을 지어주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상생의 청사진을 제안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시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 대목입니다.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것.
결국 공간이 아닌 우리 모두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행한 디자인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만족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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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리찌바를 벤치마킹한 콜롬비아 보고타의 버스 시스템
(http://thecityfix.com/blog/photo-essay-a-tale-of-two-bus-systems-in-bogota/)

도시는 슬럼화 뿐 아니라 너무 많은 자동차로 인한 교통 문제로도 고통 받고 있습니다.

시장이 되어 직접 도시를 운영하는  ‘심시티’라는 게임이 있는데, 저는 항상 같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작은 도시를 키우려면 블록을 늘려야 하고, 블록끼리 제반 시설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로를 포장해야 합니다.
도로가 많아지면, 그만큼 차량이 늘어나고, 차량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불만이 커집니다.

‘우리 도시엔 더 넓은 도로가 필요해!’
도로는 점점 더 늘어나는데, 불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콜롬비아 보고타의 전 시장이었던 엔리케 페넬로사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자동차를 제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차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자가용을 위한 정책이 아닌 보다 효율적인 버스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독창적인 교통망 구축으로 칭송받는 브라질의 꾸리찌바를 벤치마킹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꾸리찌바는 도시의 교통 문제를 가장 바람직하게 해결한 사례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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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리찌바의 원통형 버스 정류장과 버스 시스템
(http://withinnews.co.kr/m/content/view.html?section=82&category=117&no=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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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보다 녹지 면적이 10배 많은 꾸리찌바
(http://getabout.hanatour.com/archives/61250)

꾸리찌바 시는 1970년대부터 보다 효율적인 교통망 구축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교통 체증 감소와 대중 교통을 권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용도별로 차선을 구분하는 ‘3중 도로 시스템’을 기획했습니다.
버스 전용 도로, 시내 이동 도로, 시외 이동 도로로 구분했는데, 시외 도로는 아예 도시의 경계에 위치하여 교통 체증을 덜어줍니다.

서울시 또한 꾸리찌바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유명합니다만 도로교통법(신호등의 단계 및 대기 시간 등)의 차이로 인해 꾸리찌바 만큼의 효율성을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꾸리찌바의 또다른 특징은 획기적인 버스 시스템입니다.
도로 위계를 고려한 노선망과 버스에 승차할 때가 아니라 정류장에 입장할 때 요금을 지불하기 때문에 타고 내리면서 요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시간이 절약되고 편리합니다.

그 밖에도 원통형 정류장과 이중 굴절 버스의 도입으로 한 차량에 270명까지 탑승 가능하며, 배차 시간도 짧기 때문에 지상에 위치한 지하철과 다름 없는 효율성을 갖췄습니다.

꾸리찌바 시는 독창적인 교통망 구축을 통해 비슷한 규모의 타 도시에 비해 연료 소비량을 30% 감소시켰고, 버스 정류장을 짓는 것이 지하철역 신축에 비해 재정적으로도 효율적이었습니다.
또한 브라질의 도시 중 가장 낮은 교통 사고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꾸리찌바가 오늘날 세계적인 교통망 모델이 된 것은 오늘날의 지하철 역 신축처럼 일부 시민들만 이익을 보는 시장 경제 중심 기획에 머무르지 않고 시민의 삶의 질 향상과 도시의 미래에 주목했기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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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다리를 친환경 공원으로 탈바꿈한 뉴욕의 하이라인 공원
(http://blogs.dickinson.edu/urbanaturalroosting/2014/12/15/urban-urbanatural-roosting/)

<어바나이즈드>는 앞서 살펴본 뭄바이, 칠레, 보고타 외에도 다양한 도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는 철도 노선의 변경으로 버려진 철길을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뉴욕 시는 해당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했는데, 현재 하인리히 파크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중정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작년 서울시에서 이와 유사한 이벤트로 서울역 앞 폐쇄 예정인 고가도로를 시민들에게 개방한 사례가 있습니다.
서울역이 교통의 집결지인 만큼 인구밀도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높은 지역임을 감안하면, 서울역을 지나치는 이들을 위한 신선한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밖에도 케이프 타운의 범죄예방체계를 비롯해 교외화된 디트로이트의 재건을 위한 노력이 담긴 장면들을 보면서 과거에 진행했던 공공디자인 프로젝트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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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중심부에 위치한 화려한 폐허 세운상가
(http://www.snujn.com/news/3337)

대학시절에 서울시디자인재단에 세운상가에서 방산시장으로 이어지는 을지로 일대에 대한 공공디자인 제안을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한달 간 망원경과 현미경을 통해 살펴 본 을지로는 활력을 잃어가는 도시였습니다.
세운상가 내부는 사실상 영업을 위한 점포가 아닌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가 되고 있었습니다.

과제를 위해 상가에 들어온 저와 제 친구에게 상인들은 저마다의 넋두리를 털어놨습니다.
시와 재단, 기업이 세운상가 재건을 위해서 진행한다는 사업이 실제 상인들이 원하는 해결안과 적잖은 온도 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비롯해, 이제 더 이상 젊은 사람들은 이 곳을 찾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토로를 끄집어 냅니다.

주말이 되면, 구역의 모든 점포가 문을 닫기 때문에 광장을 포함한 몇 블록이 사람 한 명 돌아다니지 않는 공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세운상가에서 방산시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가로등이 없어 8시만 지나도 어둠에 잠겼습니다.

날이 밝을 때,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더니 비어있는 집과 폐가가 많았습니다.
공가와 폐가의 확산이 슬럼화로 이어진 해외 사례들을 조사하면서, 을지로의 치안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공가와 폐가를 시에서 매입하여, 제품 기반의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공공시설화 제안을 준비했습니다.
세운상가와 방산시장은 제조업과 관련된 자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공공시설화를 통해 주간에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시설의 역할을 수행하고, 야간에는 빛이 부족한 을지로에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또한 주말에 모든 가게가 셔터를 내린다는 점을 착안해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셔터에는 벽화를 그려 포토존을 만들고, 빈 광장을 이용해 프리 마켓과 팝업 스토어를 진행해보면 젊은 사람들에게 이 공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위치적 이점(명동과 DDP로 이어지는 통로)을 살려 훗날 좋은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을지로에 대한 저희의 제안은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공간의 문제를 발견하고,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지역의 이해관계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나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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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거주 환경을 연구하는 건축가 얀 겔
(http://www.husbanken.no/miljo-energi/bergen-kinofrokostmote-the-human-scale-og-gehl-arkitekter/)

<어바나이즈드>는 앞서 봤던 영화 2편과 다른 양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헬베티카>에서는 디자이너들이 대립하는 듯한 구도를 통해 건설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표현했다면, <오브젝티파이드>는 그보다 더욱 디자이너를 강조했습니다. 디자이너와 디자인된 제품 사이의 관계, 디자인된 제품과 사용자의 관계에 대해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바나이즈드>는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도시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함께 보면 좋은 다큐멘터리인 <얀 겔의 위대한 실험>의 주인공인 얀 겔을 비롯해 디자이너와 건축가 모두에게 절대적 존재인 노먼 포스터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면 잔상이 남는 것은 사람이 아닌 ‘공간’이었습니다.

뭄바이, 칠레, 보고타, 슈투르가르트, 뉴욕, 디트로이트 등 모두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질 정도로 저마다의 특색,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류가 번성한 이래 가장 도시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도시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며 보다 많은 인구가 도시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앞으로의 도시는 건축가의 손에서 완성된 건축물과 오브제 같은 물리적인 요소로 인해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건축물과 교통이 교차하며 인간에게 알맞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향후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세계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도시 실험을 진행한 건축가 얀 겔은 “우리는 마운틴 고릴라나 시베리아 호랑이에게 좋은 서식지는 알지만, 정작 인간에게 적합한 도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기존의 도시 디자인은 한 두 명의 엘리트가 주도하는 효율성을 중시한 ‘마스터플랜’에 의존해왔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면 이상적이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그저 환상에 불과합니다.

도시는 너무나도 복잡한 공간이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삶을 버텨낼 수 있는 지지대를 만들고, 머무를 수 있는 도시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지휘와 조종’이 아닌 ‘관찰과 참여’입니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인구만큼 전세계의 도시들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전세계가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력을 찾고 있습니다.
향후 인류가 머물만한 도시를 쌓기 위한 재료말입니다.
이것은 벽돌이나 철골이 아닙니다.

‘아이디어’가 도시를 그리고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원동력입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고혁준

 

* 메인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Urb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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