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2부 오브젝티파이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2부 오브젝티파이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2부 오브젝티파이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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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의 오프닝 시퀀스가 활판 공방을 통해 활자라는 매체가 지닌 역사와 물리적 특성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었다면, 이번엔 의자를 생산 중인 공장에서 ‘시스템’을 보여줍니다. 원료가 가공되고 주물 속에서 의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따라가며, 이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조너선 아이브의 목소리를 빌려 이번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모든 제품은 제작자를 대표하게 됩니다.”

1

출처. <Objectified>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디자인된 사물과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집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지금 ‘글쓰기’라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다소 묵직한 무게감을 지닌 펜으로 줄이 그어져 있지 않은 노트에 글자를 적고 있고, 다 쓰거나 종이가 모자라면 컴퓨터를 켜 옮겨 적을 것입니다.
‘글쓰기’ 안에는 펜과 노트, 그리고 컴퓨터와 저의 상호작용이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침대에서 잠들기까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된 사물과 함께 합니다.

앞서 모든 제품이 제작자를 대표한다고 말했듯, <오브젝티파이드>에는 저마다의 철학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디터 람스, 조너선 아이브, 후카사와 나오토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감상했습니다.

2

출처. <www.fastcodesign.com> 디터 람스

디자인을 전공했거나, 디자인에 관심이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쯤 접한 바 있을 ‘좋은 디자인 10계명’을 썼던 브라운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쉽고 명확한 디자인을 통해 사용자의 반응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최근 시장에 나오는 물건 중 많은 제품들이 사용자를 고려하지 않고 설계된 점을 지적합니다.
산업의 발전을 통해 비약적으로 높은 생산력을 갖춘 인류는 보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지만 사용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채 버려지는 제품 또한 많아진 것이죠.

제품의 생산에 앞서 ‘꼭 필요한 제품인가?’라는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소비품뿐 아니라 건축물과 광고 마저 명확하지 않은 가치 위에 세워지고 또 바스러지는 것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3

출처. <www.fastcodesign.com> 조너던 아이브

 조너선 아이브는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명입니다.

그는 애플을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로 발돋움 시켰습니다.
스스로가 어떤 디자이너인지 정의하는 것은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의자를 만든다고 했을 때, 의자란 무엇이고, 이것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고, 사물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를 상상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이러한 관찰과 질문이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하게 되는 원동력이라고 밝히며, 이를 통해 끊임없이 디자인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맥북 시리즈를 비롯해 오늘날의 맥 시리즈는 일체화된 알루미늄 판형을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기존에 6개로 구성되던 부품을 하나의 부품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유니바디’라고 부르며 단순한 공산품이 아닌 일종의 공예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실험을 통해 완성해낸 유니바디는 정교함에서 비롯된 심미성과 6개의 부품을 대체할 수 있다는 실용성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품들이 모여 하나의 제품을 이루고,
제품의 사용자는 이러한 ‘제품의 이야기’ 다른 말로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고민한 흔적들’을 직접적으로 읽어내긴 힘들지만, 그들의 고민을 반영한 제품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끼며, 제품과 상호작용합니다.
이처럼 사용자와 디자이너는 제품을 통해 ‘경험’을 만들어갑니다.

앞서 디터 람스는 오늘날 진정한 디자인을 하는 기업으로 애플을 꼽았고, 애플의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의 철학은 실용적이면서도 객관성을 중시하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과도 닮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철학이 과거에서 오늘날로 이어지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디터 람스는 조너선 아이브의 디자인과 닮았다는 세간의 평가를 듣고 그들이 자신을 ‘따라하는 것’이 아닌 ‘같은 철학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철학인 “Less and more”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였다고 밝혔습니다.

4

출처. <Objectified> 후카사와 나오토

MUJI의 시그니쳐 제품인 CD플레이어는 어쩌면 MUJI라는 브랜드 만큼이나 유명합니다.
이것을 디자인한 후카사와 나오토는 디자인이 사람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건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기능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은 제품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핸드폰 디자인을 의뢰 받자 ‘하루 동안 주머니에 넣고 얼마나 오래 만지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제품을 유선형이 아닌 다면형으로 제작해 제품의 각 면과 면의 가장자리를 장난감처럼 만질 수 있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이런 촉감을 통해 사용자는 무의식 중에 핸드폰을 쥐게 되고, 점차 제품과 유대감이 형성되는 차별화된 경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제품이 존재감을 지우고 사용자로 하여금 완전히 잊혀 졌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다고 합니다.
사용자의 무의식적인 행동 속에서 세상을 발견하고,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 속에 디자인이 스며들어야 한다고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설명합니다.

출처. <www.ted.com/talks> 얀 칩체이스 jan_chipchase

앞서 살펴 본 위대한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렴풋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제품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으며,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물과 사용자의 관계라는 측면을 생각하다가 문득 이전에 본 강연이 떠올랐습니다.

<관찰의 힘>의 저자인 얀 칩체이스는 TED강연에서 ‘중력 중심’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이것은 소위 말해 사용자와 사물(나아가 공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개념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일주일 전 저는 책상 정리를 했습니다.
책상에 올려져 있던 책은 책장에 꽂고, 컵이나 텀블러들도 치우고, 장난감들은 서랍에 넣었습니다.
다 치우고 나니 생각보다 책상이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지갑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에 뒀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평소엔 책상에 올려둡니다.)
3일 정도 지나고 보니 어느새 치우기 전 책상처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책들이 모인 구역, 지갑이나 개인 소지품이 모이는 구역, 필기구가 모여 있는 구역 등 마치 중력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이 물건을 발견하길 원하는 곳으로 모이는 것이죠.
이것은 책상(공간)과 사물들, 그리고 제가 만드는 상호작용의 결과물이자, 관성이기도 합니다.

<오브젝티파이드>는 1부에서 살펴봤던 <헬베티카>처럼 감독의 ‘구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헬베티카>는 서체의 탄생과 그를 둘러싼 의견의 대립을 다루며 마치 살아있는 인물의 전기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었다면, <오브젝티파이드>는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등장해 자신이 가진 철학을 소개하고, 각자의 영역에 머무른다는 인상을 줍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앞서 위대한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뒤엎듯이 버려지는 제품들을 보여주며 제품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질문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담론화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오브젝티파이드>를 다시 감상했을 때, 오프닝 시퀀스의 의미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헬베티카>에서 특정한 측면에 기울지 않고 양쪽의 의견을 제시했던 것처럼 <오브젝티파이드>에서도 다양한 디자이너를 제시하여, 결국에는 <오브젝티파이드>가 디자이너와 그의 ‘의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말했듯 모든 제품은 디자이너를 반영합니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의 의도에 의해 제품이 만들어집니다.
디자이너의 의도는 철학을 비롯해 동기, 열정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는 의식하거나 혹은 의식하지 않거나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행위를 통해 물건과 상호작용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디자인’인 셈입니다.

6

출처. <Objectified> 롭 워커

이렇게 제품디자인에 대한 찬사로 마무리될 것 같던 <오브젝티파이드>는 디자인 저술가인 롭 워커의 멘트와 얼핏 보면 의미 없이 나열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이미지들의 화학 작용으로 인해 전혀 다른 맥락으로 끝을 맺습니다.

롭 워커는 특유의 통찰력으로 영화의 주축인 거물 디자이너들의 인터뷰 사이를 바느질 하듯 촘촘하게 메워줍니다.
그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토네이도가 불어오는 상황을 가정하고 가장 소중한 물건 3가지를 챙기고 탈출한다면 무엇을 챙길지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이 질문의 의미가 처음에는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76분 간 설명했던 ‘디자이너 의도의 중요성’에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롭 워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꼽아보자면, 쉽게 연상되는 것들은 오히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골동품이나 흔해빠진 공산품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소위 ‘디자인되었다’고 보기 힘든 물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물건과도 깊은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품의 완성도 혹은 조형성이 알맞게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제품이 가진 역사성을 비롯한 총체적 감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영화는 롭 워커의 토네이도 질문과 소위 ‘덜 디자인된 사물들’을 일깨우며
결국 제품의 완성은 ‘디자이너의 의도와 생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제품과 어떤 경험을 형성하느냐’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끝을 맺습니다.

IDEO의 디자이너 데이비드 켈리는 영화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제품은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데, 대부분의 제품은 쓸수록 나빠진다.”

결국 모든 디자이너의 이상향은 여기서 말하는 ‘어떤 제품’이 아닐까요?
<오브젝티파이드>는 자신의 제품이 누군가에게 ‘쓰면 쓸수록 좋은 제품’가 될 수 있도록, 제품을 통해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을 향한 찬사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이후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어바나이즈드>에서는 인공적인 생태계, 도시의 파편들을 살펴보며, 인류와 도시,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고혁준

* 다시읽기 – [개리 허스트윗의 디자인 필름 3부작] 제1부 헬베티카, 서체를 넘어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하다

* 메인이미지 출처. MUJI (http://www.muji.us/santa-monica-photo-alb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