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바우하우스 1편. 디자인과 사회학적인 관점이 조우하는 순간

16. 바우하우스 1편. 디자인과 사회학적인 관점이 조우하는 순간

16. 바우하우스 1편. 디자인과 사회학적인 관점이 조우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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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디자인 발전과 기능주의의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건을 꼽으라면 바우하우스를 들 수 있습니다. 금주부터 2주에 걸쳐 바우하우스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 디자인 및 문화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예정입니다.

그럼 바우하우스의 역사적 의의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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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집을 짓는다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시킨 것입니다.
독일어로 하우스(Haus)는 집을 뜻하고 바우(Bau)는 건축을 뜻합니다.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이름은 과거의 건축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에도 들어맞습니다. 바우하우스는 크게 위치상의 구분과 교장의 구분으로 나뉘는데 자세한 사항은 아래 도식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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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는 미술공예협회의 후원으로 나슬로 모홀리 나기가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New Bauhaus)를 설립하지만 관리 운영상의 실패로 1938년에 폐쇄됩니다.
그렇기에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바우하우스는 반 데어 로에가 교장으로 역임한 시기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선언문을 살펴보면 “예술가들과 수공예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조형 안에서 공동의 미래 건설” 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디자인과 사회학적인 관점이 서로 조우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바우하우스의 최대 목표는 품질 좋은 제품 생산과 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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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이었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도 이러한 시대적인 경향에 부합되는 의지가 있었으며, 완벽한 규격화를 통하여 저렴하지만, 실용적인 생활공간의 건축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최초 설립되었으며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약 14년간 존속된 새로운 형태의 예술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이는 분명 기존의 학교와는 다른 교육 이념과 커리큘럼을 갖고 출발한 그야말로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바우하우스 구상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과 교수진 선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한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또한,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통해 단지 훌륭한 예술 대학으로서의 의미보다는, 모든 경우의 창조적인 잠재성을 유도하고자 하는 공공단체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싶었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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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출신의 발터 그로피우스는 당시 전도유망한 젊은 건축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왜 이러한 교육 시스템을 기획하고 도맡게 되었을까요?
먼저 이 시기 독일의 경제 상황을 살펴본다면, 19세기 말 독일은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을 뒤따르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인 정책과 관심에 힘입어 1907년 가을, 독일 우량 제품 진흥의 중심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이 결성되었습니다.

발터 그로피우스도 멤버로 활약한 독일공작연맹의 목적은 미술, 공업, 수공예가 협력해 더욱더 향상된 공업제품을 생산해냄으로써 다른 국가들간의 산업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독일공작연맹의 의의를 계승한 바우하우스의 움직임은 시대적인 흐름인 기능주의(functionalism)를 표방했습니다.
이무렵 시작된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로의 거대한 전환은 네덜란드의 데스틸과 러시아의 구조주의와 같은 조형적인 관심의 유입과, 독일공작연맹의 규격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볼 때 건축의 공업화 역시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가인 독일 내 주택단지 건설에 대한 높은 기대와 요청은 그로피우스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양질의 합리적이고 경쟁력 있는 주택이 공급되기 위해서는 예술과 기술이 결합한 표준규격의 건축자재가 대량으로 생산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1918년 11월에 창립된 예술노동평의회(Arbeitsrat fur Kunst) 활동을 거쳐 마침내 1919년 4월 바이마르에 세워진 국립바우하우스(Staatliche Bauhaus)의 교장에 임명되면서 더욱 구체화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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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구스 공장>

위의 건축물은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1년에 지은 <파구스 공장>입니다.

이 당시 기능주의 경향을 잘 나타내 주는 파구스 공장은 발터 그로피우스의 기념비적인 첫 작품입니다.
이 건물은 모서리를 받침대 없이 강철과 유리로만 감싸 가볍고 투명한 느낌을 줍니다.

바우하우스 창립 당시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배포된 팜플렛에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작성한 선언문과 교육 프로그램이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대량생산 내에서 만들어진 공산품들이 미적 아름다움과 경제성까지 두루 갖추어야 한다는 의제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선언문 내용 중 부르주아 계급의 살롱 미술로 전락한 당대의 미술은 오로지 공예가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과거의 건축정신을 되살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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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넬 파이닝거, 대성당, 1919년>

이는 바우하우스가 중세 고딕 성당 건축과 같은 작업방식, 즉 바우휘테(Bauhutte)를 참고하고 있으며, 팜플렛 표지로 쓰인 리오넬 파이링거(Lyonel Feininger)의 대성당 목판화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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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넬 파이닝거>

참고로 리오넬 파이링거는 바우하우스에서 판화인쇄를 가르치기 위해 발터 그로피우스로부터 제일 먼저 초빙된 화가입니다.
약 150명의 학생들과 함께 5월 말에 시작된 수업은 분명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리오넬 파이링거의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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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내에서는 예술가와 공예가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위계나 차별역시 불식시킨다는 의미에서 교수대신 마이스터(Meister)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개교 이래 1923년까지 학생들은 스위스 화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으로부터 형태와 색채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우는 6개월 간의 예비교육을 이수하고 도제(apprentice)가 되어 다음 단계인 3년간의 공예교육과 형태교육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공예교육은 조각, 목공, 금속, 도자,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텍스타일 등의 실기를 가르치는 각 분야의 공예마이스터(Werkemeister)가 맡았습니다.
또한, 형태교육은 자연과 재료에 관해 연구하고 공간, 색채, 구도 및 표현을 지도하는 형태 마이스터(Formmeister)가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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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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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다음시간에 다루게 될 파울 클레(Paul Klee)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922년 초에 형태 마이스터로 임용되었습니다.
선과 색의 구성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이 두화가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많아서 교육 내용 역시 매우 비슷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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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타 슈톨출>

한편 공예 마이스터의 경우는 텍스타일 공예교육을 마치고 1922년 직인 시험을 통과한 군타 슈톨출(Gunta Stozl)이 훗날 이 공방의 뛰어난 여성 지도자가 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군타 슈톨출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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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슬로 모홀리나기>

1919년 바우하우스는 선언문을 통해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이러한 외침 이후 바우하우스가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 것은 기초교육을 담당했던 요하네스 이텐이 사임하고 난 1923년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자리는 마이스터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흘리나기(Laszlo Moholy-Nagy)에게 돌아갔습니다.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기관의 교장으로서, 또한 산학 협동과 재정 확보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던 발터 그로피우스와 종교적 명상과 개인의 영성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기계를 혐오하는 요하네스 이텐은 잘 맞지 않았습니다.
반면 라슬로 모흘리나기는 기계를 “이 시대의 정신”으로 받아들인 인물입니다.

아래는 라슬로 모홀리나기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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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그로피우스는 라슬로 모흘리나기의 지원에 힘입어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을 중세주의와 낭만주의적 공예 중심에서 보다 확실하게 산업디자인 중심으로 궤도를 수정합니다.
그리고 1923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된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이러한 전환을 입증하는 자리였습니다.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바우하우스 공방에서 생산된 다양한 제품과 가구, 도자기, 그래픽 디자인, 순수 미술 작품들, 연극, 무용 공연과 실험주택 등이 <바우하우스 주간>으로 명명된 이 기간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15,000명에 이르는 관람자 수와 꽤 많은 제품 주문량에도 불구하고 전시회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세련되고 단순한 형태의 제품들이었지만 대량생산을 위한 기본 체계가 미흡한 상태에서는 여전히 수공예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가격 역시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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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를 통해 정부지원의 기회를 확대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자금 확보와 재정적 자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 바우하우스 측의 의도는 좌절됩니다.
게다가 나치가 바이마르를 장악한 후 학교 지원금 대폭 삭감과 여러 가지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바우하우스는 해산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지금부터 이러한 위기에 놓이게 된 최초의 바우하우스인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배경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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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독일의 튀어링엔(Tueringen)주 바이마르(Weimar)는 독일의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인 지위가 낮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최초의 바우하우스가 계획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우하우스는 도시경제에 이바지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던 셈입니다.
당시 튀어링엔은 문화적으로는 다른 독일 지역보다 우세하였으며, 예술공예학교가 설립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래 이미지들은 바이마르의 풍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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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는 전쟁후 가장 먼저 사회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된 곳이며, 괴테, 실러, 헤겔, 니체, 크리나흐, 리스트, 바하 등 독일의 문호와 철학자, 화가, 음악가들이 활동한 유서 깊은 곳입니다.
바이마르는 과거의 지적인 도시답게 도시 전체가 평화로움과 고요함 속에 잠겨 있습니다.
이 시기의 바우하우스를 대표하였던 교수진은 앞서 소개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둘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하는 공동의 사회적 책임을 지향하였습니다. 최초의 바우하우스인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대표적 두 인물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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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그로피우스는 독일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로 베를린에서 출생, 미국으로 귀화하여 보스턴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유럽 예술의 흐름을 이끈 바우하우스 운동의 창시자입니다.
1919년 벨기에의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의 뒤를 이어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전신인 <바이마르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지내다 모든 디자인의
새로운 통합을 지향하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를 설립합니다.
1925년에 나치의 탄압에 의해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이전합니다.

발터 그로피우스 본인이 직접 설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1925~1926)는 근대건축의 모범으로 간주할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래는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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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발터 그로피우스는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사직하고 나치 정권을 피해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그 후로 세계 곳곳을 돌며 여러 가지 근대 건축의 토대를 마련한뒤 1937년 미국으로 옮겨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합니다.
1945년 젊은 건축가들과 ‘건축가공동체(TAC)’를 결성, 하버드 대학원 센터(1949~1950), 매코믹 빌딩(1953), 베를린 한자 지구의 인테바우전(展)의 아파트(1957) 등을 세웠습니다.
사상적으로 발터 그로피우스는 미술공예운동으로 대변되는 윌리엄 모리스의 정통적 후계자로 디자인과 공업사회와의 조화를 지향하는 근대 디자인 교육의 기초이론을 확립하고 실천했으나, 자기 이상과 멀어져만 가는 새로운 산업사회와의 거리감에 깊은 좌절에 빠지며 불우한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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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또 한 명의 주축인 <요하네스 이텐>은 1919년에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청을 받아 바이마르의 종합 조형학교인 바우하우스에서 기초교육의 지도를 담당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체험을 통해서 자연의 재료의 성질을 이해시킴으로써 각자의 창조력에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체로 자연을 동경하는 신비적인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기능주의를 지향하던 바우하우스와 뜻을 같이할 수 없어 1923년에 바우하우스를 떠납니다.
그 후 1954년까지 취리히 시립공예학교 교장이 되어 조형교육에 종사하였으며, 스위스 공예계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요하네스 이텐은 미술학교와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경험을 토대로, 1961년 자신의 색채이론을 집대성한 ‘색채의 예술’을 편찬해냅니다.
그곳에서 그는 “색의 조화”란 힘의 균형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아래는 그의 저서에 실린 이미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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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이텐의 색상환이란 노랑, 빨강, 파랑의 1차색을 기준으로 그 사이에 혼합색인 2차색을 배치하고, 다시 1차색과 2차색 사이에 3차색을 배치하여 12 색상환을 만들었습니다.
색상환에서 서로 마주 보는 색은 혼합하여 보색이 되도록 했습니다.

다음에는 12색 상환을 기준으로 중심축에 무채색과 정 반대의 위치에 순색의 색상환을 갖춘 색구를 만들어 세로 6개의 선과 가로 12개의 선으로 색채를 나눠 색의 체계를 바로 잡았습니다.
이렇듯 두 위대한 예술가에 의해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는 근대적 조형의 큰 틀을 제안합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가장 강조한 점은 모든 예술 창조 행위를 결집해 조각, 회화, 공예, 수작업 등의 모든 공방 예술들로 새로운 건축 언어를 재구성하는데 있었습니다.

또한 발터 그로피우스는 새로운 미학이라는 것의 혁신성은 열린 정신과 적극적인 실험 정신에서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어찌 보면 바우하우스는 교육의 장이었다기 보다는 실험의 장이었습니다.
책임에 있어 마이스터와 학생이 서로 나눠 가졌고 실험적인 작품에 있어 교수나 학생 양측 모두 망설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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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의 교수진>

금주는 최초의 바우하우스인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와 함께 학교 내에서 두 축을 이루던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와 공예 마이스터인 요하네스 이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차주에는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로 이전해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한 <데사우 바우하우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더 나아가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장 한스 마이어(Hannes Meyer)를 포함해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의 업적을 기리며 현대 디자인 및 예술계에 끼친 영향까지 답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SY Kim[catlist name=”Design History” numberposts=5 excerpt=”yes” pagination=”yes” excerpt_size=”0″ title_only=”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