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바우하우스 2편. 문화적 배경과 데사우에서 활약한 불세출의 예술가들

17. 바우하우스 2편. 문화적 배경과 데사우에서 활약한 불세출의 예술가들

17. 바우하우스 2편. 문화적 배경과 데사우에서 활약한 불세출의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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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는 저번 주에 이어 바우하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한 주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금주에 주로 다루게 될 내용은 데사우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문화적 배경과 데사우에서 활약했던 한스 마이어, 파울 클레와, 칸딘스키 등의 불세출의 예술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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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그로피우스가 1926년 완공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인한 정치적 탄압과 지원금 대폭 삭감으로 힘겨운 세월을 맞이합니다.
이때 독일 북부의 산업도시 데사우시 에서 바우하우스를 인수하겠다는 소식을 발터 그로피우스는 전해 듣습니다. 시 당국은 바우하우스를 통해 주거공간 문제 해결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1926년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리 정면과 철골 구조로 이루어진 획기적이고 아름다운 새 바우하우스 건물을 1년 만에 완공해 선보입니다.
대학의 지위를 얻은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들은 그제야 교수로 불렸고 졸업생들은 석사학위를 인정받습니다.
무엇보다 1927년 건축과가 개설되어 교수 주택과 퇴르텐 주택단지, 그리고 시내의 아케이드 건물 등의 주요 건축 임무를 도맡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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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바우하우스 교장, 한스 마이어>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28년 마침내 교장에서 물러났고, 스위스의 건축가 한스 마이어(Hannes Meyer)가 새로이 부임됩니다.
한스 마이어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서 석공으로 시작해 스위스, 벨기에 독일에서 건축연습생으로 시작했으며, 독일에센(Essen)에 있는 무기제조 업체인 크루프공장(Krupp Works)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한스 마이어가 편찬한 주요 저서인 “인간의 삶에서 얻는 디자인”에서는 한스 마이어 본인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생활, 잠자는 습관, 애완동물, 유원지, 개인건강, 비바람막이, 위생, 자동차 관리, 요리, 뜨거움, 일광욕, 서비스와 같은 것들은 집을 짓는데 있어서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는 집에서 사는 모든사람들의 행동에서 모티브를 얻어내고 이런 것은 디자이너에게 기능적인 다이어그램을 제공한다.
그렇게 얻은 다이어그램과 경제적인 프로그램은 건물계획의 주요 요점을 결정한다. (한스마이어,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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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마이어의 드로잉 소묘, 1933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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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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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작업을 보다 철저하고 비인간적인 기능주의로 변형시키는 동시에, 학내에서 청년 공산주의 조직을 육성하려 했습니다.( 이때의 공산주의라 함은 지금의 북한 보다는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리는 게 맞습니다.)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생산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마르크스주의자 한스 마이어와 바우하우스 미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파울 클레와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와 같은 예술가들 사이의 불화는 쉽게 사그러 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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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마르크스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한스 마이어에 의한 바우하우스의 좌경화가 부담스러웠던 시 당국은 1930년 한스 마이어를 해임합니다. 이에 한스 마이어는 몇 몇 학생들과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로 옮겨가, ‘Left Column’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해 일합니다.
‘레프트 칼럼 조직’은 1936년 스탈린에 의해 소련으로부터 추방되고, 한스 마이어는 제네바에 잠시 머물다가 멕시코로 옮겨갑니다.
멕시코시티에서 활동하던 한스 마이어는, 1942년 애인으로 추정되는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의 사망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그녀의 사망에 한스 마이어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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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모도티, 1896 – 1942>

티나 모도티는 이탈리아 출신 영화배우 겸 모델 겸 사진작가 겸 공산주의자로, 언젠가 자기 직업이 ‘men’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의 행적은 이탈리아, 소련, 멕시코, 스페인 등을 아우르는데, 멕시코시티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가 쫓겨난 후 러시아 비밀경찰에 포섭되어 유럽을 무대로 간첩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녀의 사진에는 시대의 정신을 독특한 형식으로 담고 있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습니다.
그녀의 사진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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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한스 마이어는 독일 당국과의 정치적 충돌로 해임되고 그 뒤로 독일의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바우하우스의 3대 교장에 초빙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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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의 3대 교장,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독일의 표현주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유럽에서 일어난 근대건축의 추상적인 흐름과 유기적인 디자인을 표현주의라고 칭합니다. 특히, 독일의 표현주의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유리를 주재료로 사용해 환상적인 건축을 계획하였을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유기적인 형태로 표현하였습니다. 지금부터 그러한 표현주의의 대표적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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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스워드 주택 (Farnsworth House)>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대표작인 판스워드 주택은 기둥을 바닥 슬라브에 접합하는 구성방식으로 기둥의 길이를 늘리고 슬라브를 추가함으로써 확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집에 사용된 재료의 양은 기존 건축양식 보다 분명 적었지만 접합이라는 방식을 활용해 기존에 많은 재료를 사용한 건축보다 더욱 풍성 하게 보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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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운 홀 (Crown Hall)>

또 다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인 크라운 홀입니다. 판스워드 주택의 바닥 슬라브 밑의 공간이 개방되어 있다면 크라운 홀은 판유리로 끼워져 지하층과 연결 되어 있는 형태 입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크라운 홀에서 공간의 개방성과 수직요소의 반복적인 리듬 등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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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램 빌딩>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그램 빌딩을 제작 함에 있어 강한 수직성을 강조했고 기둥과 건물 외관의 일체화를 표현 했습니다.
그의 건축 철학과 예술관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으며 재료에는 청동이 주로 사용 되었습니다. 시그램 빌딩에 쓰인 청동은 따스함을 나타내고 있어 이건물이 차갑다는 이미지를 재료로서 벗을 수 있었습니다. 수직성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 것은 거리에서 약 100피트 정도 뒤쪽 위치에 세워진 것 때문인데 그로 하여금 보행자는 이 건물의 전체 높이를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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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126주년 기념 구글 로고 >

표현주의 건축사에 주요한 작품들을 남긴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우하우스를 철저하게 건축예술 중심으로 운영합니다.
상품 제작 역시 오직 건축과 연결되고 공업적 생산이 가능한 디자인으로 제한합니다.
여기서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정책에 강한 반발심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에서
순수 예술 연구 강화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바우하우스의 순수 예술가들 가운데 파울 클레 같은 이는 바우하우스를 떠나는 쪽을 택했고, 바실리 칸딘스키는 순수미술 강의가 폐지되지 않도록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상대로 항의와 설득을 지속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란도 잠시, 1932년 9월 데사우 시의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나치주의자들에 의해 바우하우스는 폐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다행히 계약상의 의무 이행에 따라 교수들의 봉급과 남은 기간 및 교육 자재 공급은 보장됩니다.
이에 2년 차 교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우하우스를 자신이 인수해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옛 전화기 공장 건물을 인수해 사립 연구소로소 수업을 재개했으나 또다시 나치 정권의 탄압은 극에 달합니다. 1년이 채 못된 1933년 7월 20일, 칸딘스키를 비롯한 교수진과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마침내 바우하우스 폐교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바우하우스에서 순수예술 계열의 커다란 두 축인 파울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파울클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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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

사진이 발명된 후 순수 예술의 역할 자체가 모호해 졌을 때 파울클레는 “순수 예술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면을 표현해야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자신이 남긴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 파울 클레의 작품은 구상적인 미술양식과 추상적인 미술양식 모두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미술 사조에 속한다고 단정 짓기조차 불가능합니다.
파울 클레는 작품에서 엄격한 입방체와 점묘법, 그리고 자유로운 드로잉을 실험했으며, 그가 접했던 모든 미술 사조의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그는 청기사파, 뮌헨 신분리파, 청색 4인조, 바우하우스 등의 미술 모임과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가입 요청을 거절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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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1914년에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아프리카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클레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색채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나는 화가다.” 이는 여행 중에 습작을 하면서 느낀 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색채를 하루 중 어느 때인지를 알려주는 수단이나 감정적인 반응들을 유도해내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리듬과 패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캔버스 위에 다양한 색조의 분포를 결정했습니다. 클레는 일찍부터 음악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러한 점이 그의 미술 작품의 형식에 영향을 준듯합니다.
그는 많은 작품들을 음악적인 구조로 정돈했는데, 마치 악보 위에 음표들을 배열하듯이 색채들을 정확히 배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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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에게 있어, 리듬이란 근원적인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것은 반복이 아닌, 규칙적인 것들과 불규칙한 것들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클레는 캔버스 위에 균일한 선들을 가득 그려놓고, 그 선들 위에 조화롭지 못한 형상들을 그려 악센트를 줌으로써 시선이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독일을 떠나기 전까지, 많은 급진적인 미술가들의 모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클레는 항상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곤 했습니다.
그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박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클레는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유대인이라는 누명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100여 점 이상의 작품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파울 클레의 작품들을 보며 한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애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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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와 더불어 바우하우스의 순수예술 파트의 또 다른 대표적 교수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시아 태생의 화가입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냈습니다.
칸딘스키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의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음악적이고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색채와 선, 면 등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으며, 형태와 색채가 사물의 겉모습을 그려내기보다 작가의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그는 추상미술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을 음악에 비유해 설명했습니다.
“색채는 건반,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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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정신적인 가치와 색채에 대한 탐구로 칸딘스키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불립니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옵니다.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수학적으로 제한된 엄격한 형태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형태인 원은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색채 사용을 멈춘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1933년 나치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되자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모두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칸딘스키의 작품들을 보며 그의 예술적 행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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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바우하우스의 인재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자국으로 돌아가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합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시카고 <뉴바우하우스>를 설립합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일리노이 공과 대학 건축학과에서 활동하며 바우하우스 교수진과 학생들을 불러모읍니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바우하우스를 계승한 ‘올름 조형대학(Hochschule fuer Gestaltungulm)’이 1955년 막스 빌에 의해 세워집니다.
이렇게 바우하우스는 끝이 났지만, 그 열정의 불씨들은 세계 곳곳에 옮겨붙어 조용하지만 강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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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바우하우스의 흔적은 쉽게 발견됩니다. 대부분의 미술 대학 커리큘럼이 바로 90년 전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으로부터 발전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우하우스에서 생산된 전등, 벽지, 가구와 같은 산업제품들, 그리고 타이포그래피 등은 그 그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와 구성으로 디자인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형식 미학의 주요한 테제인 “대부분 의미는 형식 속에 침전되어 있다”라는 말을 상기시켜 보면 바우하우스가 만들어낸 수 많은 시각체계들의
외형에서 보이는 극도의 절제와 기능주의는 그 형식미를 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커다란 인식틀(모더니티)을 우리에게 제공한 것입니다.

 

끝으로 바우하우스에서 제작된 다양한 공산품들의 이미지를 보며 금주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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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브로이어, Wassily Chair,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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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반 데어 로에, 바르셀로나,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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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치디자인그룹 SY Kim[catlist name=”Design History” numberposts=5 excerpt=”yes” pagination=”yes” excerpt_size=”0″ title_only=”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