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라는 형식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아트 슈피겔만의 ‘쥐’

이데올로기를 하급문화인 만화로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물음입니다.
사실 이러한 물음의 저변에는 만화라는 형식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의구심도 같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트 슈피겔만의 쥐를 따라가다 보면 뒤늦게 만화라는 형식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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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책의 내용은 ‘나’의 아버지인 ‘블라덱’이 나치 정권하에서 겪은 일화에 관한 서술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게슈타포에게 억압받는 실상들을 사실상 ‘쥐’ 이전에도 존재했던 많은 예술을 통해 간헐적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이 만화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일까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에서 보여준 극한의 리얼리즘과 비교해보아도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그 사실성에서 떨어진다는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현장감이 이 만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형식미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블라덱 자신이 나치 정권하에서 겪었던 일들을 만화가인 아들 ‘나’에게 구술하며, 이를 ‘나’는 기록
합니다.
피해자의 증언에 따른 인터뷰 형식인 셈입니다.
이러한 구성이 가능한 이유는 아들인 ‘나’가 아버지 블라덱의 일을 이용해 만화를 출판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아들과 아버지를 둘러싼 세밀한 상황묘사에 주목해보면 아들과 아버지는 약간은 서먹한 사이며, 아버지는 재혼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재혼한 어머니는 늘 돈타령을 하고 아버지 블라덱은 그런 사실을 못마땅해합니다.
아들인 ‘나’는 이러한 상황에 직접 개입하기는 꺼립니다.
위에서 보듯 아들 ‘나’는 아버지의 추한 면까지 사실적으로 그리며 이는 곧 나치 정권에 대한 아버지의 일화를 사실적으로 그리겠다는 일종의 선언으로 보입니다. 이는 ‘쥐’가 영화보다 견고히 리얼리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형식으로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이 친부와 실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뷰 형식을
통해 아버지란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려는 노력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노력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버지 블라덱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강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모순도 많은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순에 대해서 낱낱이 기록하는 저자는 나치정권의 만행에 대해서는 오히려 주관적 개입을 배제합니다.

여기서 더해지는 새로운 형식이 바로 의인화인데, 유대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돼지 같은 형식입니다.
물론 나치를 고양이에 비유한 것과 약자인 유대인을 ‘쥐’에 비유한 것에서 폭력과 힘의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 블라덱의 인종에 관한 생각입니다.
아버지 블라덱은 아들인 ‘나’가 차에 흑인을 태우는 것을 보고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도 나치의 인종주의에 대한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렇듯 아버지 블라덱의 뿌리 깊게 박혀있는 인종에 대한 아이러니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을 만큼 깊습니다.
자신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는 순진하리만큼 무지합니다.
그렇기에 인종을 동물에 빗대는 ‘쥐’의 형식에서 이때 당시 만연했던 인종주의에 대한 숨겨진 은유성 또한 느껴집니다.

‘쥐’는 현실과 과거를 오갑니다.
현실의 아버지 블라덱의 모순적인 모습들이 과거의 나치정권하에서 살기 위해 치열했던 모습들과 연결되며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시간성은 묘하게도 독자에게 선명한 리얼리티를
증여해주고 현실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주요한 거울상으로 작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있었던 만화의 요소 중 하나는 등장하는 ‘쥐’들의 입이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감정이 격해졌을때만 고개가 뒤로 젖히며 입이 보이는데 이는 만화를 통틀어서 불과 몇 차례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해석될 부분이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주관적 개입을 배제하려는 저자의 신중함에 대한 암묵적인 시그널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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